‘L번방’ 디지털 성범죄 대책은
《2019년 9월 N번방 사건이 처음 알려진 뒤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와 함께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3년, 한층 진화한 수법으로 L번방(가칭) 사건이 발생했다. 법적 대응이 어려운 아동·청소년에게 접근한 뒤 피해자 지원단체를 사칭해 안심시키고 성착취물을 찍도록 강요한 것이다. 지난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신고된 디지털 성범죄는 1만1568건. 지금도 창궐하는 수많은 N번방을 수사하려면 어떤 기술적 지원이 필요하며, 일상이 파괴된 피해자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N번방 사건 당시 기술 자문을 했던 김승주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와 한국여성변호사회 법률지원단에서 활동했던 김수현 변호사에게 8일 각각 물었다.》
디지털 수사 전문가 김승주 교수
김승주 교수는 8일 “프라이버시 침해 같은 디지털 수사의 특수성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N번방은 추적단 불꽃이 많은 자료를 확보해 넘긴 데다 워낙 사회적 이슈가 돼 많은 인력이 투입됐다. L번방 사건이 처음에는 여성청소년과에 배당됐다고 한다. 디지털 수사 인력 투입이 적었던 반면, L번방 가해자들은 학습 효과를 통해 진화했다. 조주빈 문형욱 등의 공범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수사 기법을 공유하며 학습한 것 같다.”
“경찰의 전문성보다 성착취물 유통 과정에서 그 흔적을 추적하기가 너무 어려워진 것이 문제다. 판매자는 기록이 남지 않는 다크웹을 통해 구매자를 모집한다. 텔레그램은 일반 메신저와 달리 서버에도 암호로 저장된다. 압수수색해 이를 확보해도 별 의미가 없다. 돈 거래도 쫓기 힘들다. 계좌나 카드가 아닌 가상화폐를 쓴다. N번방만 해도 비트코인보다 더 익명성이 보장되는 모네로를 썼다.”
―인공지능(AI)을 도입해 영상을 모니터링하는 등 N번방 대책이 발표됐었는데….
“AI 기술이 아직 그만큼 성숙되지 않았다. 사전 차단을 우회할 기술도 있고 다크웹, 텔레그램에선 먹통이다. 네이버, 다음 같은 플랫폼과 협력해 운용해 볼 수 있었는데 사전검열 논란이 불거졌다. 실효성이 떨어지고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는 기술을 도입할 이유가 있냐는 것이다. 이는 칼이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고 만들지 말자는 것과 같다. 공공의 이익과 프라이버시 보호가 어떻게 균형을 맞춰야 할지 공감대가 없으니 디지털 성범죄에 대항할 기술이 발전하기 어렵다.”
―지난해 경찰의 위장 수사도 도입됐다.
―디지털 성범죄 예방에 있어서 어떤 기술의 개발이 필요한가.
“도깨비방망이 같은 기술은 없다. 우리는 기술이 없는 게 아니라 기술 개발에 끈기 있는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 반면 디지털 성범죄로 돈을 벌고자 하는 이들은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익히고 수사망을 피해 다닌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다크웹의 기술적 빈틈은 없는지, 텔레그램 암호를 해독할 방법이 없는지 연구한다.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기술이 축적된다. 우리는 중·장기적 기술 개발이 어려운 환경이다.”
―그렇다면, 현재로서 디지털 성범죄 근절에 가장 효과적인 대책은 무엇인가.
“디지털 성범죄는 여성 대상 범죄나 형사 사건으로만 다룰 수 없다. 수사 기법의 전문성이 필요한데 정부 회의를 가면 이런 인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찰은 똑같은 자원을 투자할 경우 빨리 해결되는 범죄를 수사하지, 수사를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디지털 성범죄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 한국은 인터넷 속도가 빠르고, 디지털 기기 보급률이 높다. 피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정부 내 컨트롤타워를 정해 디지털 성범죄, 아니면 이를 사이버 범죄로 확대시켜 수사권이나 예산권 같은 칼을 쥐여줘야 한다.”
N번방 피해 지원 김수현 변호사
김수현 변호사는 8일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고통에 비해 가해자의 죄의식이 가볍다”고 안타까워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경찰의 L번방 수사가 지연돼 논란이 되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는 경찰의 초동 수사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남자친구의 요구로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했는데 그 동영상이 유포됐다. 경찰 수사가 미지근한 사이 가해자는 한강에 휴대전화를 버리고 되레 피해자를 협박했다. 게다가 경찰은 피해자가 동의했다며 불기소 처분했다. 재수사를 해도 기억 안 난다, 물증이 없다 하면 처벌할 수 없어 항고를 포기했다. 가해자를 응징할 수 없게 되면 피해자는 절망과 분노에 빠진다. 도울 길이 없어 너무 괴로웠던 사건이다. L을 놓치면 L번방의 피해자는 같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경찰이 L번방 영상이 유포된 정황이 없다고 하는데….
“L번방은 위장 수사를 막기 위해 가해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추려 회원방을 만들었다. 그 회원방의 최상위방에 L이 있다. 서로 공범이 된 것이다. 금전적 이익 없이, 단지 성욕 충족이 목적이라 보기에는 너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유포는 시간문제라고 본다.”
―L번방에서 드러난 피해자가 7명인데 대부분 미성년자다.
“미성년자는 ‘부모님이나 선생님한테 알리겠다’는 한마디면 굴복한다. 쉽게 범죄 대상이 되는 이유다. 그런데 미성년자의 성범죄 피해 수사의 경우, 이 사실을 반드시 부모에게 알리도록 돼 있다. 합성 사진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에 시달리던 학생이 수사를 하게 되면 부모님이 알게 될까 봐 신고를 포기했다. 경찰 지침이 바뀌어야 신고가 활발해질 것이다. 관련 법에 따르면, 미성년 피해자는 부모 동의가 없더라도 영상 삭제 등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피해자와 상담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무엇인가.
“수사기관이 적극적으로 대응만 해도 피해자의 고통을 덜 수 있다. 당장 수사 개시가 어렵더라도 피해자 응대 매뉴얼을 만들어 즉각적인 지원체계 안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피해자 지원단체를 소개해 영상 삭제를 돕거나 심리 상담을 연계할 수 있다. 수사 과정에서 ‘왜 성관계 영상을 촬영했나’ ‘왜 비키니 사진을 공개했나’ 등 피해자 탓을 하는 2차 가해도 없어야 한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미비한 것은 아닌가.
“법은 충분하다. 형법, 아동복지법, 아동·청소년의 성보호법, 성폭력범죄처벌법,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법 등이 혼재된 것이 문제다. 법이 중구난방이면 오히려 피해자 보호의 사각지대가 생긴다. 비동의 유포죄 해석이 그 예다. 차라리 하나의 법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피해자 지원 시스템도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의 경우,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김승주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전 성균관대 정보통신공학부 부교수
△마퀴스 후스후(2007∼2008년) 등재
△한국정보보호학회 이사
△대검찰청 디지털수사 자문위원
△방송통신위원회 정보통신망 침해사고민관합동조사단 위원
김수현 변호사△사법연수원 45기
△법무법인 한별 변호사
△한국여성변호사회 사업이사
△n번방 피해자 법률지원단 변호사
△경기 디지털성범죄 법률지원단 변호사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