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어머니가 들려준 소녀 때 추억 가족 간 실금 같은 연계 확인하는 게 명절 정담 남기고 험담 덜어내는 가을 됐으면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추석날 직전까지 마감 원고를 쓰다가 반찬가게에 예약해놓은 음식을 찾으러 갔다. 손이 많이 가는 전이나 부침은 사서 놓자는 내 오랜 권유를 어머니가 드디어 받아들이신 것이다. 이번 음식이 괜찮아야 다음에도 이 방법이 통할 텐데 약간 걱정이 들었다. 안 되면 추석 직전 성균관에서 발표한 차례상 표준안을 알려드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남편도 그러겠다고 했다. 표준안에는 명절 노동의 주범인 전 같은 기름진 음식은 올리지 않는 것이 예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려가 보니 어머님은 새 표준안에 대해 이미 알고 계셨다. 기사로 접하면서 이런 권고가 부모님들에게 효과가 있을까 싶었는데 적어도 어머님은 그 내용을 눈여겨보신 듯했다. 음식을 사다가 놓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때마침 전통과 권위의 성균관에서 거기에 확실한 당위를 부여해준 셈이었다. 어차피 올릴 필요 없는 전과 튀김이라면 조금 사다가 구색을 맞추는 정도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차례상에 올라온 음식 중 가족들의 시선을 빼앗은 건 단연 멜론이었다. 멜론이 그 상에 놓인 데는 사연이 있었는데 ‘배달 사고’로 들어온 과일이기 때문이었다. 보낸 과일을 잘 받았다고 전화 주시면서 어머님이 “어머나, 멜론이 너무 싱싱하다, 얘…” 하셨을 때가 다시 한번 화제로 올랐다. 제사 때 쓸 과일을 사면서 누가 멜론을 넣을까. 명절 의례라고 하면 좀 난색부터 표하는 나이지만 어떤 과일이 오르는가 하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판매처에 전화를 걸어 배달 사고를 알렸더니 회수하고 다시 갖다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주에는 이미 태풍이 예고되어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명절 대목에 배송 기사들이 어떤 스케줄로 일하고 있을지는 알 만한 것 아닌가. 어머님은 그냥 멜론을 먹자고 하셨다.
끝나고 식사를 하는데 식구들의 대화가 길고 길게 이어졌다. 공간도, 시간적 배경도, 각자의 입장도 서로 다른 다양한 이야기가. 어머님이 서울에 있는 한 중학교의 입학시험을 봤다는 건 남편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버지가 권해 시험을 보러 갔는데 건물들이 너무 높고 사람이 무섭도록 많고 화장실도 못 찾을 만큼 복잡해 그만 시험장을 찾지 못했다고. 내내 시골에서 살았던 열세 살 소녀가 갑자기 서울로 와 일생일대의 시험을 봐야 했을 때 얼마나 눈이 캄캄했을지, 그렇게 시험을 망치고 도로 내려가야 했을 때 얼마나 자책했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어머님은 아마 시험을 제대로 봤더라도 떨어졌을 거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큰딸에게 새 길을 열어주고 싶어 했던 당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리움에 잠기시는 것 같았다. 꽁치 한 마리를 사면 늘 큰딸의 몫으로 가운데 토막을 남겨두었던 당신은 큰비가 오는 날 밤길을 걷다 사고로 갑작스럽게 가족들 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어때, 소설 한 편 나왔어?”
어머님 마음이 슬픔에 잠긴 걸 눈치챘는지 남편이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꿨다.
“아니야, 나 소설 쓰려고 듣고 있었던 거 아니야.”
당일 일정을 마치고 다시 내 집으로 가는데 결국 명절이란 그저 이야기가 남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복기하고 그 재현을 통해 가족들 사이의 실금 같은 연계들을 그려보는 것. 먼저 산 사람들이 어떤 슬픔과 기쁨을 건너 여기까지 왔는지 느끼고 알게 되는 것.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내게도 추석 때의 모든 대화들이 정답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 모든 사사로운 불쾌감들은 흐릿해지고 여기 없는 사람들과 지나간 순간에 대한 용인과 그리움만 남게 될 거라는 것. 그러니 추석 때의 많은 말들 중 정담은 남기고 험담은 덜어내 되도록 간소한 마음을 만들었으면 한다. 그것이 가을을 맞는 우리의 새로운 표준안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