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영 정치부 차장
최근 정부 고위 당국자에게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 물었다. 윤석열 정부는 한일 관계를 풀려는 의지가 강하다. 양국 간 최대 현안인 일본 전범기업의 국내 자산 강제 현금화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분주하다. 이에 해결이 더뎌지는 게 일본 정부의 강경한 태도 탓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문재인 정부 인사들의 ‘알박기’가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그간 공공기관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이사장을 비롯해 전 정부에서 임명된 임원들이 해법을 찾는 데 훼방을 놨다는 얘기였다. 이들이 8월 초 임기를 다 마친 뒤 ‘드디어’ 물러나면서 정부는 돌파구를 찾은 듯했다.
동아일보는 올해 초 ‘한국판 플럼북’ 기획을 통해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직책을 규정하자는 제안을 했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판결로 ‘찍어내기’도, ‘낙하산 인사’도 쉽지 않을 차기 정권을 위한 현실적 해법이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곤혹스러울 거라고 했다. 정권이 교체돼도 정부의 손발은 전 정부와 철학을 공유하는 이들이고, 자칫 되는 일 없이 임기 절반이 흘러갈 수 있다고 했다.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2018, 2019년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를 담당했던 현 정권의 핵심 인사는 “당시 수사를 너무 애써서 했나 싶다”라고 농반진반으로 얘기했다.
전 정권 인사들을 찍어낼 방법이 없으니 여권에서는 온갖 간접적인 사퇴 압박이 이뤄진다. 1단계는 여론전이다. 처음에는 “그 정권의 철학을 같이해 온 이들은 정권 교체가 되면 자진 사퇴하는 게 순리”라고 점잖게 말했다. 먹히지 않자 2단계 망신 주기에 들어갔다. 가령 정해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에 대해선 “자신이 적폐라고 불렀던 세력이 집권했는데도 알박기를 한다”고 공격하는 식이다. 이제는 감사원의 특별감사, 기획재정부의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 등 각종 합법적인 장치를 동원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당선으로 ‘정권 10년 주기설’도 깨졌다. 정권 교체는 언제든 이뤄질 수 있다. 그렇다면 계속 감사를 하고, 고발하는 식으로 전 정권 인사를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침 더불어민주당이 대통령과 공공기관장의 ‘임기 불일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안을 발의했다. 민주당 우상호 비상대책위원장은 “필요하면 전 정부에서 임명된 사람도 임기를 즉각 중단시키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여야가 대타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권을 잡고서야 후회하면 늦다. 이번에는 잘 헤어질 방법을 찾아야 한다.
홍수영 정치부 차장 ga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