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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진영]“살아서 퇴근하고 싶다”

입력 | 2022-09-19 03:00:00


서울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발생한 스토킹 살인은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역무원인 피해자는 제복 차림으로 순찰 중이었다. 공격당한 직후 곧바로 비상벨을 눌러 1분 만에 동료 역무원들이 달려왔고, 119구조대가 8분 만에 도착했다. 하지만 제복도, 적시의 대응도 참사를 막지 못했다. 스토킹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번 사건은 스토킹 범죄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스토킹 가해자는 대부분 피해자와 아는 사이다. 피해자 A 씨(28)와 가해자 전모 씨(31)도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였다. 일반 범죄의 경우 특별한 원한 관계가 아니면 동일인을 상대로 반복해서 저지르진 않는다. 하지만 스토킹은 상대가 마음을 받아주거나, 물리적으로 스토킹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아니면 장기간에 걸쳐 반복된다. A 씨는 입사 이듬해인 2019년부터 전화와 문자로 300차례 이상 스토킹을 당했다.

▷스토킹의 세 번째 특징은 갈수록 피해가 커진다는 점. 전 씨는 처음엔 ‘만나 달라’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가 ‘불법 촬영물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하는 단계로 갔다. A 씨는 지난해 10월 불법 촬영과 협박 혐의로 전 씨를 고소했지만 이후로도 피해가 계속되자 올 1월 스토킹 혐의로 재차 고소했다. 징역 9년을 구형받은 전 씨는 결국 A 씨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1심 선고 하루 전날이었다. 범행 당일 법원에 두 달 치 반성문을 제출하고도 신당역에서 1시간을 기다렸다가 범행을 저질렀다.

▷그래서 스토킹은 초기에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데 바로 경찰에 신고하기란 쉽지 않다. 괜히 자극했다가 더 큰 봉변을 당할까 겁도 난다. 가족이나 직장에 피해가 갈까 숨기는 경우가 많아 주변에서 도와주기도 어렵다. A 씨도 피해가 3년 가까이 이어진 후에야 경찰을 찾았다. 법의 보호도 허술했다. 법원은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전 씨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가 회계사 자격증을 가진 점도 참작했을 것이다. 경찰은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신변보호 조치를 소홀히 했다.

▷이번 사건은 지난해 10월 스토킹방지법이 시행된 후 발생했다. 스토커 김태현의 서울 노원구 세 모녀 살해 사건이 발생한 직후 통과된 법이다. 예전엔 과태료 10만 원의 경범죄로 처벌하던 스토킹 범죄를 이제는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 벌금형으로 다스린다. 하지만 무거운 형벌이 범죄를 막아주진 못한다. 스토킹을 사소한 범죄쯤으로 여기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신당역 같은 일상의 공간은 “살아서 퇴근하고 싶다”는 메모로 가득한 두려움의 공간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