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獻身·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함). 8일 서거한 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헌신이란 이렇게 하는 것임을 보여줬다. 96세에도,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까지도, 여왕은 우아하고도 기품 있게 지팡이를 짚고는, 한때 군주제 폐지를 외쳤던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와 새 내각 구성에 관한 회동을 가졌다고 했다.
그렇게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의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다 바치고는, 앓을 새도 없이 여왕은 우리 곁을 떠났다. 21살 때인1947년 남아공연방 케이프타운에서 맞은 생일 자리에서 “제 삶이 길든 짧든 모두 국민 여러분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고 선언했던 그 다짐 그대로였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 이틀 전인 9월6일(현지 시간)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를 접견하며 악수를 하고 있다. 애버딘셔=AP 뉴시스
●나라 위해 아들까지 희생시켰던 여왕
내 나라, 남의 나라 할 것 없이 정치적 양극화가 판치는 세상이다. 어떤 정파나 이데올로기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국민만 위한다는 게 쉬울 리 없다.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엘리자베스 공주는 군 수송부대 여자국방군에 입대해 대형 트럭운전을 했다. 남편 필립 공은 해군 장교였고 아들 찰스 왕세자도 해군으로 근무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고위층은 물론 고위층 자제들 병역기피가 수두룩한 우리 현실이 많이 부끄럽다). 내 한 몸 나라와 국민에 바치는 게 보통 일인가. 더구나 자식까지 희생시켜가며 오로지 공공, 의무, 통합, 관용, 화해, 애국, 봉사를 실천하는 건 쉬운 일이던가.
이젠 왕이 된 찰스3세는 젊은 날 ‘온전한 왕세자빈’을 구하기 위해 불행한 결혼을 해야만 했던 아픔이 있다. 이혼녀 심슨 부인과의 결혼을 위해 왕관을 버렸던, 그래서 군주제를 위태롭게 만들었던 큰아버지 에드워드8세 같은 일을 또 벌여선 안 됐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어떤 이념의 대통령이었나
재임 시절 무슨 이유에선지 딸과 손자를 태국으로 내보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핵무기를 쓰도록 법제화한 북한에 대해 하필 (발음도 해괴한) 18일 “정부가 바뀌었어도 ‘9·19 군사합의’는 마땅히 존중하고 이행해야 할 약속”이라고 발언했다. 북한 김정은은 개성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그놈의 합의를 무수히 파기했는데 말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20년 6월 17일 2면에 개성의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현장을 공개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김정은에게 핵포기 의사가 있다고 국민 앞에 거짓을 말했던 문 전 대통령이었다. 정권이 교체된 데는 북한에 굴종적이어서, 안보가 불안해서라는 이유도 적지 않다. 국민의 생명과 안보가 위협받는 판인데도 윤석열 정부는 거짓약속을 존중해야 한다니, 문재인은 대체 어떤 이념을 지닌 대통령이었단 말인가.
●민주국가 톱10 중 5개국이 군주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를 계기로 정파와 이념을 초월해 국민을 하나로 통합해주면서, 모든 국민에게 위안을 주고 화합의 상징이 돼주는 (입헌)군주제가 민주주의에 잘 맞는다는 패러독스가 영국에서 나오는 모양이다(^^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돌아가신 영국이니까요).
이코노미스트 부설 조사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167개국을 조사한 2021년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실제로 글로벌 톱10국가 중 절반인 5개국이 군주국이었다(1위 노르웨이, 2위 뉴질랜드, 4위 스웨덴, 6위 덴마크, 9위 호주).
좀 신기하지 않은가. 입헌군주국이긴 하지만 왕을 모신다는 건 현대 민주주의 사회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글로벌 톱20개국으로 넓히면 딱 절반인 10개국에서 왕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11위 네덜란드, 12위 캐나다, 14위 룩셈부르크 그리고 17위인 일본과 18위인 영국. 궁금하신 분을 위하여 알려드리면 한국은 16위였다).
2013년에 즉위한 네덜란드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과 가족. 신화통신
●그런데 왜 대통령들은 제왕적이 되는가
민주주의 지수에선 20위까지가 ‘완전한 민주주의’로 분류된다. 당연히 입헌군주제이고 모두 의원내각제다. 눈치들 채셨겠지만 일본을 제외하곤 북유럽과 서유럽, 그리고 영연방과 영국(성공회) 개신교 국가들이다. 15~17세기 계몽군주가 자신의 이익보다 국민을 앞세우는 ‘책임정부’와 법치주의를 확립해선 지금까지 군주제의 역사와 전통을 지켜왔다.
●헌법대로 총리가 내치 이끌게 하라
우리도 1948년 제헌 헌법을 내각제로 만들었던 비화가 있다. 그렇다고 당장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하자는 건 아니다. 없는 왕을 이제 와 만들어낼 수도 없다. 하지만 왕도 아닌 대통령이, 심지어 청와대도 국민께 돌려드렸다면서, 자꾸만 정파적 제왕적이 되는 것은 불길하다. 대통령이 마음만 먹는다면, 헌법에 보장된 총리의 권한만 인정해도 내각과 의회가 잘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앗...민주당에 대한 협조요청도 필요하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