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장례식 르포] 英국민들 24시간 기다려 참배…여왕 리더십 떠올리며 연대감 “세상은 급변하고 분열됐지만 여왕 한결같이 우리 곁 지켜줘”
런던=조은아 특파원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새웠어요. 함께 줄을 서며 단단해졌습니다(tighten).”
샤론 스태플래튼 씨는 19일(현지 시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이 열리기 전 추모 기간에 런던 템스강변에서 이틀이나 줄을 선 뒤 웨스트민스터 홀에 안치된 여왕의 관에 참배했다. 영국 에식스에 사는 스태플래튼 씨는 템스강변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밤샘 줄서기’의 감동을 전했다. 그는 얼굴에 피곤이 묻어났지만 “이곳에서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우린 모든 것을 함께하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8일 서거한 여왕의 장례식이 열린 19일까지 영국인들은 12일간 쌀쌀해진 날씨와 비바람에도 최장 24시간 줄을 서며 추모의 시간을 보냈다. 시민들은 “세상은 급변하지만 여왕은 한결같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세계가 분열하고 파편화되면서 굳건한 여왕의 리더십이 더 그리워졌다고 했다.
“굿바이, 퀸” 엘리자베스 2세 역사 속에 잠들다 19일(현지 시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이 거행된 뒤 영국 왕실 근위대가 휘장으로 덮인 관을 운구해 나오고 있다. 관 위에는 여왕의 왕관이 놓여 있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부 등 주요국 참석자 약 2000명은 관이 지나갈 때 고개를 숙이며 여왕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70년을 재위한 여왕은 윈저성의 세인트조지 예배당으로 옮겨져 남편 필립 공 옆에 영면했다. 런던=AP 뉴시스
생전 특유의 겸손과 유머, 탈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영국과 영연방 국가를 하나로 묶었던 여왕은 서거 뒤에도 12일간 영국인들이 연대하게 만드는 힘이 됐다.
19일 여왕의 장례식은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등 전 세계에서 집결한 정상 500여 명을 비롯한 2000명의 주요 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엄수됐다. 여왕의 관은 장례식에 앞서 왕립 해군 142명이 끄는 포차(砲車)에 실려 웨스트민스터 홀을 떠났다.
“여왕은 수많은 사람들 안에 존재”… 96회 빅벤 타종 속에 작별
96년 여왕 생애 기린 장례식
“여왕, 헌신하겠다는 약속 지켜” 추모객들, 기부-봉사 통해 뜻 이어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군인 합주…찰스-윌리엄 등 포차 행렬 동행
런던 명물 빅벤, 1분마다 타종…윈저성의 남편 필립공 옆에 영면
관 위의 여왕 왕관 여왕의 관 위에 권위를 상징하는 ‘제국 왕관’이 놓여 있다. 런던=AP 뉴시스
19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國葬)으로 진행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에서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는 설교를 통해 “봉사하는 자들은 존경받고 기억될 것이지만 권력과 특권에 매달리는 이들은 잊혀질 것”이라며 “여왕이 (자신의) 약속처럼 모든 삶을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에 헌신”했다고 말했다. “(여왕처럼) 자신의 약속을 훌륭하게 지킬 수 있는 지도자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여왕의 이런 뜻을 기리려는 듯 장례식장 주변에서는 각종 지역사회 봉사자들이 소속 단체 이름이 적힌 조끼를 입고 기다림에 지친 추모객들에게 간식과 음료를 선물했다. 주요국 정상 등 일부 귀빈만 장례식장에 입장할 수 있어 사원에 들어가지 못한 100만 명 이상의 추모객들이 주변 도로의 펜스 뒤편에 몰려들어 스마트폰 등으로 엄숙하게 장례식 생중계를 함께 지켜봤다.
○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군인들 합주
여왕 관 운구행렬 웰링턴아치로 19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이 엄수된 뒤 여왕의 관 운구 행렬이 사원을 떠나 하이드파크의 웰링턴아치로 향하고 있다. 영국 근위병들이 거리 양쪽에 도열해 있다. 런던=AP 뉴시스
이후 붉은 제복의 왕실 근위대 8명이 붉은색 휘장으로 덮인 관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운구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1953년 여왕이 대관식을 치르고 1947년 남편 필립 공과 결혼식을 올린 곳이다.
장례식 후반부에는 화려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 뒤 2분간 묵념이 이어졌다. 런던의 상징인 빅벤이 1분에 한 번씩 여왕을 추모하는 조종을 울렸다. 여왕의 96년 생애를 기리기 위해 96회 타종했다. 그러자 시민들이 “여왕에게 축복이 있기를!”이라고 외쳤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떠난 여왕의 관은 생전 여왕의 집무실이던 버킹엄궁을 지났다. 궁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이 근무 복장 그대로 여왕을 맞이했다. 관은 버킹엄궁을 지나 하이드파크 코너에 있는 웰링턴아치까지 천천히 이동하며 런던 곳곳에 작별을 고했다.
오후 1시경 여왕의 관은 운구차에 실려 도로를 따라 여왕이 유년 시절을 보내 가장 좋아하는 거처로 알려진 윈저성으로 출발했다. 런던에서 떠나는 여왕을 향해 시민들은 각자 준비한 붉은 장미, 흰 장미를 운구차 쪽으로 던지며 추모했다. 여왕은 윈저성의 세인트조지 예배당 내에 있는 남편 필립 공 옆에 묻혔다.
○ 인파 통제 경찰-군인에게도 “힘내라” 박수
시민들 사원 밖에서 추모 19일(현지 시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이 진행된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밖에서 기다리던 시민들이 여왕을 추모하고 있다. 런던=AP 뉴시스
템스강변에서 긴 줄을 서던 추모객들은 인파를 통제하는 경찰과 군인들이 대거 줄지어 지나갈 때마다 환호하며 기립 박수를 보냈다. 레슬리 브라운 씨는 AP통신에 “함께 줄을 섰던 사람들과 얼싸안았다”며 “행렬이 잘 조직됐고 경찰을 포함해 모두 정말 친근했다”고 말했다.
“항상 다른 사람을 도우려 했던 여왕의 선의”를 기억하는 추모객들은 추모의 의미로 기부에 나섰다. 스테프 에번스 씨는 영국 BBC에 “결국 죽게 될 꽃을 바치는 대신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자원봉사 활동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런던=조은아 특파원achim@donga.com
신아형 기자 abr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