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남극에 길을 내며 지구의 미래를 생각한다”[더 퓨처스]

입력 | 2022-09-21 11:53:00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을 흔히 새로운 길을 여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말로 새 길을 내는 사람이 있다. 극지연구소 미답지연구단 전성준 선임기술원(39). 2017년부터 대한민국이 수행 중인 K루트(코리안루트·남극 내륙 연구를 위한 육상루트) 탐사에 매년 참여하고 지난해 10월~올해 4월에는 K루트 탐사대의 역대 최연소 대장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12월 이 탐사대가 총 길이 1740km의 K루트를 개척하면서 한국은 남극 내륙 진출로를 확보한 세계 7번째 나라가 됐다. 

남극은 1819년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젊은 대륙이다. 원주민도, 주인도 없는 무한한 미래와 가능성의 미개척 땅이다. K루트 탐사대는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빙원 위에 길을 낸다. 인류의 과거를 이해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최근 남극의 빙하가 빠르게 녹아내리는 가운데 2060년부터는 남극의 해빙 속도가 북극을 앞설 전망이다. 남극은 기후변화의 위기에 맞설 세상의 끝이다. 20일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극지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20일 극지연구소 로비에서 남극 황제펭귄 박제와 함께 선 전성준 극지연구소 미답지연구단 선임기술원.  인천=김동주 기자 zoo@donga.com

     

―K루트를 내는 이유는?


“남극의 오래된 빙하는 기후정보, 운석은 인류와 지구의 기원을 담고 있다. 평균 해발고도 가 2000m인 내륙의 돔C 지역은 100만 년 전의 빙하가 존재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각국의 과학계가 주목한다. 3000m급 심부빙하 시추, 빙하에서 과거 온실가스 농도를 복원할 수 있는 블루 아이스 연구, 천문·우주 관측 등 내륙 기반의 연구를 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11월 남극 장보고과학기지를 출발한 K루트 탐사대

     
 남극은 가장 건조하면서 추운 지역이라 운석이 오래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탐사대가 운석을 가져오면 극지연구소와 한국천문연구원의 연구진이 구성물질 등을 분석한다. 남극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손과 발’이 K루트 탐사대다. 

  남극에는 30여 개국이 운영하는 80여 개의 과학기지가 있다. 한국은 세종과학기지(1988년)와 장보고과학기지(2014년)가 있다. 전 선임기술원이 이끄는 탐사대는 지난해 11월 장보고과학기지를 출발해 37일 만에 돔C 지역의 콩코르디아 기지에 도착했다.

지난해 12월 개척한 총 길이 1740km의 코리안루트.  사진제공=극지연구소

     
 
―남극에 처음 갔을 때 느낌은?
“공기가 깨끗해 난생 처음 탄산수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모든 지형이 또렷하게 보였다.”


 ―빙원 사이사이의 얼음 낭떠러지가 위험해 보이는데…
“한국항공우주연구원으로부터 아리랑 5호의 인공위성 사진을 받아 탐사에 활용하지만 숨겨진 크레바스(crevasse·빙하가 깨어져 생기는 틈)가 많다. 크레바스를 만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에 선 기분이다. 설상차를 몰다가 크레바스에 빠지기도 한다.”  

남극 난센빙붕에 진입하는 선단. 사진제공=극지연구소



―기후변화로 남극의 빙하가 빠르게 녹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올해 탐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 탐사대장으로서 힘들었다. 그동안 남극 장보고과학기지의 3월 기온은 영하 10도 아래였는데 올해는 영상 8.8도까지 올랐다. 기지에서 3월에 영상 온도가 확인된 건 처음이었다. 장보고기지로부터 100km 구간에 특히 크레바스가 많다. 탐사대의 안전팀은 ‘빙하가 녹아 위험하니 차량 등 장비를 장보고기지 100km 전에 남겨두고 사람만 비행기로 돌아가자’고 했다. 중장비팀은 ‘어떻게 장비를 빙원 위에 두고 오느냐’고 반대했고.” 


―극지의 MZ세대 대장으로서 어떤 리더십을 발휘했나?
“최종 결정은 현장 지휘관이 내릴 수밖에 없다. 며칠간 잠 못 이루며 고민하다가 대원들에게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목표 지점이었던 돔C가 아니라 우리의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안전하게 귀환하는 것이라고, 장비는 고장 날 수 있어도 사람은 다치면 안 된다고. ‘형님’ ‘선생님’이라 부르며 대원들 개별 면담도 진행해 이견을 조정할 수 있었다.”


K루트 탐사대가 남극에서 열수를 시추하는 모습



  
―남극에서의 카라반 생활은 우주선 생활과 비슷할 것 같다.
“그렇다. 한 모듈에 2층 침대를 두고 4명씩 잔다. 눈 녹인 물을 발전시켜 샤워를 하고 배변은 태운다. 식사는 즉석식품을 끓인 물에 데워 먹는다. 백야 때 암막커튼을 치고 자지만 불면증이 올 때가 많다. 그럴 땐 남극 대륙을 바라보며 가족 생각을 한다.” 


―그렇게 힘든 일인데 보람을 느끼나?
“‘국뽕’(맹목적인 국가 찬양)이나 ‘애국 페이’(애국심으로 노동력 착취)는 결코 아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남극에서는 우리 인류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구에 어떤 역사와 미래를 남겨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남극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하는 대상이다.”


인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