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10년 만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발표 3주 만에 1만부 판매돼… 니체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 문턱 낮춘 신작엔 젊은층 공감… 세월호 사고땐 ‘그날 이후’ 발표 “감성적-지성적 위계의식 없애 슬픔을 털어놓은 고백 같은 시”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펴낸 진은영 시인은 “사랑을 하는 순간엔 누구나 자신을 바꾸려고 몸과 마음을 연다. 동시에 사랑을 하는 이들은 늘 실패하는 어설픈 견습공이자 습작생”이라고 말했다. ⓒ손엔 제공
진은영 시인(52)은 최근 10년 가까이 안팎으로 많은 부침을 겪었다. 2017년 심장 수술을 받은 뒤 한동안 건강 악화로 고생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고 유예은 양(단원고 2년)을 위한 시 ‘그날 이후’를 썼고 2015년엔 유가족을 상담한 정혜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대담집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도 펴냈다. 그는 2013년부터 한국상담대학원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심리상담사 지망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15일 전화 인터뷰한 진 시인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시란 무엇일까 고심했다. 시가 지녀야 할 사회적 역할을 돌아본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시인은 “지금도 몸이 썩 좋지 않아 직접 만나 인터뷰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고민의 세월이 헛되지 않은 것일까. 지난달 31일 출간한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문학과지성사·사진)는 나온 지 약 3주 만에 1만 부가 팔렸다. 시집으로는 이례적으로 온라인서점 알라딘의 종합순위 10위에도 올랐다.
진 시인은 그간 깊은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는 시를 쓴다는 평을 받아왔다. 이화여대에서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를 분석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신작에 실린 42편은 접근하기 다소 높았던 작품의 문턱을 한껏 낮췄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청혼’), ‘내 모든 게 마음에 든다고/너는 말했다’(‘사랑합니다’) 등 담백하고 편안한 문장이 돋보인다. 시인 역시 “독자들이 이번 시집은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슬픔의 공동체’로 여겨준 것 같다”며 “시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니 시인으로서는 정말 다행이다”라고 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대놓고 얘기하더군요. ‘교수님 시가 너무 어려워요’라고요. 문학적 성취보다 상담 치료를 위해 시를 배우는 학생들인지라 더 깊게 와 닿았습니다. 시인들이 지닌 감성적, 지성적 위계의식을 깨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어요. 누구나 공감하는 사랑이란 주제를 많이 쓴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시인에게 세월호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과제다. 유 양을 위한 시 ‘그날 이후’는 물론이고 덤덤해서 더 시리고 아픈 시 ‘아빠’도 이번 시집에 담았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유가족을 위한 문학행사인 ‘304 낭독회’에는 꾸준히 참석했다. 낭독회는 304명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기리며 시를 낭송하는 모임으로 매달 한 번 열린다.
진 시인은 다작을 하는 시인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거북이”라 불렀다. 느리게 읽고, 오래 고민하며, 천천히 쓴다.
“달마다 딱 한 편씩 쓰려고 해요. 매너리즘에 빠지지도, 자기표절도 하지 않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시인에게 필요한 건 한 가지입니다. 계속해서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죠.”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