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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 기자의 죽기전 멜로디]세트리스트의 골든아워

입력 | 2022-09-22 03:00:00

2018년 12월 서울 용산구 무대에 오른 영국 밴드 ‘주다스 프리스트’의 리치 포크너(기타·왼쪽)와 롭 핼퍼드(보컬). 핼퍼드는 이날도 역시 ‘Before the Dawn’은 끝내 부르지 않았다. 앞서 서면 인터뷰에서 “주다스 프리스트를 정의할 세 곡 중 하나”로 꼽았음에도 말이다. 라이브네이션코리아 제공

임희윤 기자


21일 밤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8만여 개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가수 겸 배우 아이유(29)가 한국 여성 솔로 가수 최초로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연 역사적 콘서트. 최고의 시간을 뜻하는 공연 제목 ‘더 골든아워’처럼 아이유는 화려한 연출, 완벽에 가까운 가창으로 높은 감정의 파고를 만들어냈다.

“(오늘은) 제가 너무 사랑하는 곡의 졸업식이기도 해요.”(아이유)

공연 중 건넨 아이유의 이 말은 어쩌면 공연보다 더 여운이 남은 선언이었다. 우리 나이로 서른 살 된 데뷔 14년 차 가수가 대표곡 ‘팔레트’와 ‘좋은 날’을 앞으로 정식 세트리스트(set list·공연 곡목)에서 보기 힘들 것이라고 공언한 것이다. ‘팔레트’는 “스물다섯 살의 지은이(본명 이지은)에게 남겨주고 싶다”고, ‘좋은 날’은 “3단 고음을 부른 뒤 퇴장해 쉬어야 하기에 전체 공연 구성이 비슷해지는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1. 세트리스트. 공연의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의 순서를 정하는 이것은 공연의 기승전결, 드라마적 성격을 결정하는 불가결한 요소다. 따라서 때로 첫 곡에 앞서는 ‘0번 곡’마저도 기막힌 연출이 된다. 메탈리카는 무대에 등장할 때 늘 ‘Ecstasy of Gold’를 튼다. 영화 ‘석양의 무법자’의 주제곡. 이탈리아 영화음악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이 장중한 스파게티 웨스턴의 명곡을 배경으로 마치 미국 프로레슬러들처럼 거들먹거리며 등장할 때 객석은 초장부터 들끓는다.

#2. 메탈리카가 ‘0번 곡’ 추가라는 덧셈의 미학을 파고든다면 뺄셈의 미학도 존재한다. 미래의 아이유 콘서트가 그러할 것이다. 특히 ‘좋은 날’은 현장에서 듣기 힘들어지면서 국가 행사나 정말 특별히 좋은 날만 부르는 곡, 이른바 ‘레전드 넘버(number·곡)’로 값어치가 폭등할 가능성이 높다. 의도했든 아니든.

영국의 세계적 밴드 라디오헤드는 최대 히트곡 ‘Creep’을 7년간 전혀 부르지 않았다.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과 함께 1990년대 청춘을 대변한 역사적 명곡인데 2009년을 마지막으로 돌연 연주를 그만뒀다. 2016년 초, 그들이 다시 ‘Creep’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라디오헤드의 모든 공연은 ‘광속’으로 매진되기 시작했다.

#3. 감동적인 곡 ‘Silence Is Easy’로 유명한 영국 그룹 ‘스타세일러’는 꽁꽁 아껴뒀다가 한국 공연에만 오면 푸는 곡이 있다. 전 세계를 누비며 수백 회의 공연을 했지만 22년의 밴드 역사상 단 8번만 무대에 올린 노래, ‘Bring My Love’다. 그 8번 중 3번을 서울에서 연주했다. 박찬욱 감독 영화 ‘올드보이’ 예고편에 실린 인연 때문. 2007년 내한 때는 객석에서 박 감독이 흐뭇하게 이 곡을 감상하는 것을 목격했다.

#4. ‘백조의 노래’처럼 평생 단 한 번만 무대에 오르는 곡도 존재한다. 얼마 전 영국 여왕 서거 때문에 고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비극적 죽음도 재조명되며 생각났다. ‘Candle in the Wind 1987.’ 엘턴 존의 1973년 명반 ‘Goodbye Yellow Brick Road’에 실린 원곡 ‘Candle in the Wind’는 배우 매릴린 먼로에 대한 헌사였지만 다이애나 빈의 비극적 죽음 직후 존이 개사해 ‘Goodbye England‘s rose(안녕히, 잉글랜드의 장미)’로 시작하는 노래다. 존은 이 버전을 단 한 번 라이브로 불렀는데 다이애나 빈의 장례식 때였다.

#5. 어떤 노래는, 누군가의 평생에 걸쳐 단 한 번도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 영국의 전설적 헤비메탈 밴드 주다스 프리스트의 1978년 곡 ‘Before the Dawn’. ‘Metal Gods(메탈 신)’라는 별칭처럼 징 박힌 가죽 재킷을 입고 모터사이클을 탄 채 엔진 굉음을 뿌리며 무대에 등장하는 난폭하고 마초적인 로커, 보컬 롭 핼퍼드는 1998년 어떤 고백을 한다. 실은 성소수자였다는 커밍아웃. 40대 후반 로커의 고해는 당시 음악계에 큰 충격을 줬다.

그 뒤 무려 20년 묵은 곡 ‘Before the Dawn’에 대한 스토리도 밝혀졌다. 핼퍼드가 미국 순회공연 때 만난 한 남성에 대한 애타는 연가였다는….

‘동 트기 전, 당신의 속삭임을 들었지/“아침이 그를 데려가지 않도록 해주세요”’

1990년 ‘Painkiller’라는 강렬한 음악적 진통제를 만들었던 핼퍼드도 ‘Before the Dawn’에 봉인한 상흔만은 치유할 진통제를 구하지 못한 것일까. 달콤한 속삭임만 남긴 채, 동이 트면 반드시 떠나야만 했던 그이는 누구였을까. 죽기 전, 이 멜로디를 공연장에서 들을 수 있을까.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