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배신에 분노한 메데이아는 감정을 숨긴 채 주도면밀하게 복수를 계획한다. 그는 끝내 남편에게 더 큰 슬픔을 안기기 위해 두 아들마저 살해한다. 자식들을 죽이려는 메데이아의 모습을 그린 외젠 들라크루아의 ‘분노한 메데이아’(1862년 작·왼쪽 사진). 기원전 330년경 제작된 항아리에 메데이아가 자식을 살해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루브르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언제부터인지 드라마, 영화, 웹툰 등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고품격 막장.’ 더 내려갈 곳 없는 바닥이 막장인데 그것이 ‘고품격’이라니, ‘둥근 사각형’ 같은 형용모순이 아닐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꽤 그럴듯한 표현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고전 작품의 태반이 불륜, 패륜, 배신, 복수, 살해를 다룬 막장 이야기가 아닌가. 서양 문학의 정수로 칭송받는 그리스 비극 작품들도 그런 ‘고품격 막장’의 전형이다. 남편에게 배신당한 여인의 복수를 다룬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가 특히 그렇다.》
모든 것 바쳤던 남편의 배신
메데이아는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여인이다. 황금 양피를 구하러 낯선 나라를 찾아온 이아손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녀는 모든 것을 바쳐 그의 모험을 도왔다. 남자를 위해 아버지와 오빠를 배신하고 조국을 버렸다. 황금 양피를 찾아오면 왕위를 넘겨주겠다던 이아손의 삼촌이 약속을 안 지키자,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도와 거짓말쟁이 삼촌을 죽였다. 이 사건 때문에 이국땅 코린토스로 쫓겨났지만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다. 두 아들과 남편을 위한 뒷바라지는 계속됐다.
이아손과 메데이아가 혼인 맹세의 표시로 서로 손을 내미는 장면을 새긴 로마 시대의 석관. 로마 팔라초 알템프스 소장.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친아들 죽여 남편에 복수
메데이아는 숙고한다. 하지만 그녀가 내린 결정은 남편 살해가 아니다. 죽음의 고통은 너무 약하다. 그는 살아서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야 한다. 무엇이 그런 고통일까. 그의 씨를 말리는 것, 자식들을 죽이는 것이다. 아이들을 향한 그의 간절한 바람을 역이용하는 것이 메데이아의 계획이었다. 그래서 막장이다. 배신, 복수, 친자 살해의 이야기가 ‘막장’이 아니라면 무엇이 막장일까. 물론 모성이 계획의 실행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메데이아의 가슴속에서 모성과 복수심 사이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복수의 욕망이 모성을 이긴다. 공주와 왕을 죽인 뒤 아이들을 구할 묘안이 없다는 생각도 그녀가 자식 살해의 결심을 굳힌 이유였다. 내 자식은 내 손으로 죽이겠다!
이 이야기를 대하는 우리가 그렇듯이, 2453년 전 아테네의 관객들도 사건의 전개에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남편을 위해 헌신하다 배신당한 여인은 연민을 낳지만, 복수를 위해 친자 살해를 계획하는 여인은 두려움을 낳는다. 메데이아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많은 여성이 겪은 수모와 불행을 대변하는 여인이지만, 목숨을 내걸고 복수를 위해 돌진하는 남성적 영웅의 화신이기도 하다. 복수를 위해 내거는 것이 자신의 목숨이나 친구의 목숨이 아니라 친자식의 목숨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행동은 더 극단적이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여자와 복수를 행하는 남자의 양면성 때문에 메데이아는 젠더의 경계를 뛰어넘는(gender-crossing) 인물이다. ‘메데이아’는 비극 경연에서 3등을 했다. 비극 경연에 참여한 작가는 세 명이었으니까 꼴찌였다. 메데이아의 복수에 공감했던 관객들도 자식 살해에는 동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영리해서 더 무서운 인간성
화난 짐승은 무섭다. 물불을 안 가리며 목숨 걸고 달려드니까. 하지만 그런 무서움은 치밀하게 계획된 복수, 영리하게 잘 짠 행동의 무서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deinos는 그런 영리함과 무서움을 함께 가리킨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어떤 불행을, 내가 자초하고 있는지. 분노의 마음이 복수 계획을 다스리며 이끌고 있구나.” 메데이아는 모든 상황을 잘 안다. 그녀의 행동은 화난 짐승의 무분별한 행동이 아니다. 복수를 위해 여러 대안을 고려해 선택하면서 계획을 세우고, 계획의 성공적 실행을 위해 감정을 숨긴다. 메데이아가 자식들을 살해한 것은 비이성적인 힘의 작용이 아니라 분노에 지배되는 이성의 작용이었다.
“무서운 것이 많지만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에우리피데스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작가 소포클레스의 말이다. 온갖 술수에 능한 정치가, 대중을 휘어잡는 선동가, 놀라운 기계를 만들어내는 기술자는 모두 무서운 존재들이다. 그들은 영리해서, 목적의 선악을 묻지 않고 모든 것을 꾸며내기 때문이다. 메데이아에게도 그런 영리한 인간의 무서움이 있다. 새끼를 죽이는 암사자나 여느 사나운 짐승의 무서움이 아니라 오직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무서움이다. 오이디푸스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인간의 대명사라면, 메데이아는 영리하고 무서운 인간의 대명사다.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버림받은 여인들의 이야기이자 낯선 나라에서 소외된 삶을 사는 ‘타자’의 이야기이지만, 그에 앞서 목적 성취를 위해 만사를 계획하고 감행하는 이성의 힘, 인간의 영리함과 무서움에 대한 이야기다. 배신, 복수, 친자 살해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의 어두운 심연을 보여주는 ‘메데이아’는 고품격 막장이 아닐까.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