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현지 시간) 러시아 동부 사하공화국 야쿠츠크에서 한 남성이 입영소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기 전 가족으로 보이는 여성과 부둥켜안고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텔레그램 영상 캡처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 동원령을 내린 지 하루 만에 러시아 전역에서 징집 절차가 시작됐다. 하루 아침에 가족과 연인을 전쟁터로 떠나보내게 된 러시아인들은 ‘생이별’ 위기에 놓였다.
이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온라인에서는 입영을 앞두고 가족들과 마지막일 수도 있는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담긴 동영상과 사진이 쉼 없이 올라왔다. 전날 저녁 러시아 다게스탄 공화국 수도 마하치칼라에서는 한 공터에 몰려 있던 시민 수십 명이 이제 막 출발하는 버스 10여 대와 군용 트럭을 향해 울음을 터뜨렸다. 한 여성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통곡했다. 같은 날 러시아 벨고로드주(州) 스타리 오스콜 지역에서는 한 여자 어린이가 동원령에 소집돼 전쟁터로 떠나는 아빠를 향해 “아빠 안녕. 꼭 돌아와”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21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예비군 동원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진압 경찰이 연행하고 있다. 모스크바=AP/뉴시스
이날 러시아 독립 언론 모스크바타임즈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의 동원령 이후 이날 하루 동안 전국에서 징집된 장병 숫자는 1만 명에 달했다. 전국적 징집이 시작된 이날 러시아군은 가을까지 여성을 포함한 12만 명을 징집하겠다고 밝혔다. 모스크바타임즈는 “동원 대상이 아닌 군 경험이 없는 남성과 학생들까지 당국으로부터 동원 소집 요구서를 받았다”고 전했다.
무차별적으로 날아드는 ‘징집 요구서’… ‘총동원 공포’ 확산
22일(현지 시간) 러시아 동부 사하공화국 야쿠츠크의 네륭그리 마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동원된 러시아 남성들이 입영 버스에 탑승하기 전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텔레그램 영상 캡처
22일 모스크바에서 반전 시위를 하다 경찰에 붙잡힌 모스크바 대학생 안드레이 샤스코프(18)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이 같이 밝혔다. 러시아 현지 언론들도 당국자들이 반전 시위를 하다 구금된 시위대를 상대로 소집 요구서를 건네며 징집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반전 시위 현장을 취재하다 체포된 현직 기자도 소집 요구서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 “나이·경력 관계없이 무차별 징집”
러시아가 대대적인 징병에 착수하면서 수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주요 도시를 비롯해 시베리아 국경 지역 주민 등 약 1만 명이 하루 사이 전쟁터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WSJ은 이날 연령과 직업에 관계없이 징집 통지서가 발송되고 있다고 전했다. 군 복무 경험이 없거나 대학생일 경우 동원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러시아 정부의 방침과 달리 무차별적으로 징집 요구서가 날아들고 있다는 것. 러시아 변호사 그리고리 바이판은 이날 뉴욕타임즈(NYT)에 “군 복무 경험이 없는데도 소집 요구서를 받았다”며 “전쟁이 처음 터졌을 때와 똑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공항에 도착한 한 17세 러시아 남성은 독일 언론 DW에 “소집 대상도 아니고 아직 소집 요구서를 받지도 않았지만 혹시나 모를 두려움 때문에 러시아를 빠져나왔다”고 했다. 러시아 내 인권단체 대표인 세르게이 크리펜코는 모스크바타임즈에 “통상 하루에 50건 정도 문의가 오는데 동원령 선포 이후 이틀 간 동원령 관련 문의전화가 1만4000통 넘게 몰렸다”고 했다.
21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출처 러시아 대통령 공보실
● “전쟁이 아니라 정치에 동원된 것”
한 남성은 군 모집소 관계자를 향해 “2차 대전 당시 동원령은 진짜 전쟁을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 동원령은 오직 정치를 위한 것”이라고 소리쳤다. 모집소 관계자가 “동원령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하자 이 남성은 “도대체 누구의 미래를 말하는 것이냐”며 맞받았다.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 톨리야티 지역 군인 모집소에는 방화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불이 나기도 했다.물자도 총동원되고 있다. NYT에 따르면 동부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징집 장병을 수송하기 위해 스쿨버스까지 동원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학교 교사들이 소집 요구서를 돌리는데 동원돼 집집마다 방문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동원령을 피해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도 ‘생이별’에 슬퍼하고 있다. 이들의 탈출을 돕는 비정부기구(NGO) ‘자유세계로의 인도(Guide to the free World)’대표 노바노프스카야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동원령 이후 하루 동안 150만 명이 단체 웹사이트에 방문했다고 밝혔다. 징집 대상자이거나 막연한 두려움에 러시아를 빠져나온 남성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카이로=강성휘 특파원 yolo@donga.com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