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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종 입학 1호 탈북 기타리스트의 꿈[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입력 | 2022-09-25 09:00:00


남과 북에서 20년 넘게 기타와 함께 외길 인생을 걸어온 유은지.

아버지는 정전으로 깜깜해진 함흥역에서 클래식 기타의 선율에 혼을 빼앗겼다.

마침 북한군 협주단이 지방공연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다 무료해지자 한 여성단원이 기타를 꺼내든 것이다.

가느다란 기타줄 6개의 떨림이 악다구니로 가득 찼던 역사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군복을 입은 여성 기타리스트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 딸도 꼭 저런 멋진 기타리스트로 키워야지….”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8살 어린 둘째 딸을 불렀다.

“너 이제부터 무용을 그만두고 기타를 배워.”

1994년 인민학교 1학년생이던 유은지는 그렇게 기타와 인연을 맺었다.

사실 그는 무용을 하고 싶었다. 3살 때 세 살 터울의 언니를 따라 유치원에 갔다가 선생님의 눈에 들어 무용을 시작했다. 그 유치원 선생님은 어린 유치원생에게 무용을 가르쳐 TV에 잘 내보내기로 유명했다. 언니 뒤를 따라 온 3살 꼬마에게 무슨 재능을 발견했는지 부모를 설득해 1년 먼저 유치원에 입학하게 했다.

은지는 3살부터 회초리를 맞으며 무용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을 훈련을 하니 수시로 함흥대극장에 가 공연을 하게 됐고 박수를 받았다. 함흥대극장은 평양대극장보다 무려 1.7배나 더 큰, 북한의 지방 극장 중 가장 큰 극장이었다.

은지는 아직도 5년 동안 무용을 배웠던 첫 선생님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여성 중 가장 예뻤어요. 결혼도 안하고 제자들 키우는 데만 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그 선생님도 탈북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됐는데 지금은 살아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은지의 무용 경력은 아버지의 변심으로 중단됐다. 아버지라고 딸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겠지만, 무용보다는 음악으로 평생을 살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기타와의 첫 인연
은지의 집은 함흥에서 도보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군수공장 지역에 있었다. 출입문 위엔 ‘모범가정’이라고 쓴 액자가 붙어있었다. 선정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을에서 모범이 되는 가정을 선정해 현관 위에 붙여준다.

은지의 아버지는 기술 관련 4년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철학과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어머니는 결혼 전에 바이올린을 전공한 예술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는 은지의 언니에겐 유치원 때부터 바이올린을 전공하게 했다. 은지가 인민학교에서 기타를 배우게 되면서 두 자매는 함께 사이좋게 학교 ‘음악소조’를 다녔다.

“자라면서 부모님이 큰소리치는 것도, 욕을 하는 것도, 싸우는 것도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 자매도 다툼 없이 자랐어요. 언니는 정말 착해서 늘 저에게 양보만 했어요. 언니랑 음악소조에 함께 다닐 때 정말 행복했어요.”

인민학교에서 기타를 시작했지만, 북한에선 주니어용 기타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은지는 어른들이 치는 통기타로 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엔 손가락이 너무 아파 계속 울었다. 못하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뭘 사준다고 계속 달래며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 힘들어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은지도 언니랑 함께 음악소조에 다니는 것이 너무 좋았고, 또 음악시간이 제일 재미있었다.

학교 음악선생이라고 기타를 전공한 것은 아니어서, 기타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다. 4학년이 되니 선생은 음악소조 아이들의 기타 연주는 은지에게 가르치라고 했다.

2012년 여름 연주 갔던 길에 전주 한옥마을에서 유은지.


#언니의 희생
은지의 인민학교(초등학교) 4년 과정은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시절과 겹친다. 1995년~1998년 사이 북한에선 굶주림으로 많은 아사자가 생겨났다. 공업도시 함흥은 특히 사정이 어려웠다.

은지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량이 없어 나물을 뜯어와 죽을 쑤어먹을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굶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대학 교무과장을 지냈기 때문이다. 교무과장은 이런저런 이유로 뇌물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뇌물에 거부감을 가지던 아버지도 점점 상황이 나빠지자 스스럼없이 학생들이 주는 쌀이나 술을 받아 집에 갖고 왔다. 당시 북에서 최고의 대학이라고 자부하는 김일성대까지 포함해 교육자들이 모두 그렇게 살았다. 배급도 월급도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가져다주는 것까지 받지 않으면 굶어죽거나 또는 학교를 나가 장사를 하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뇌물로 식구가 풍족히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밀주를 만들어 팔고 돼지를 키웠다.

아무리 고난의 행군 시절이라고 해도 잘 사는 집은 잘 살았다. 그리고 있는 집 자식들이 음악소조에 들어왔다. 은지는 음악소조에서 가장 가난한 축에 속했다.

은지의 부모는 딸을 둘 다 뒷바라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는 논의 끝에 첫째 딸에게 바이올린을 그만두게 했다. 아무래도 둘째가 좀 더 재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6년 넘게 훈련했던 바이올린을 그만두라고 했을 때 ‘천사’ 언니는 아무 말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했고, 동생을 위해 언니인 자기가 양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모는 둘째 딸이 기가 죽지 말라고 없는 살림에도 쌀을 구해 밥솥 구석에 따로 안쳤다. 밤늦게까지 훈련을 해야 하는 음악소조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저는 어렸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어요.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언니 대신 나는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집은 비록 가난하지만 실력은 최고로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훈련을 했다. 시끄럽지 않게 부엌에 나가 훈련했고, 시끄럽다는 동네 민원이 들어오면 외진 창고에 가서 훈련을 했다. 깊은 밤중에 외진 어두운 창고에 들어가는 것은 10살 안팎의 어린 여자애에겐 너무 무서운 일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밤에 어두운 곳에서 계속 훈련을 하다보니 학교에 가서 훈련을 할 때 눈을 뜨고 기타를 잘 치지 못했어요. 습관이 되어 눈을 감고 쳐야 더 잘 됐어요.”

그렇게 갈고 닦은 실력 덕분에 은지는 가난했지만 음악소조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인민학교 시절을 보내고 11살 때인 1998년 은지는 고등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중학교에는 은지에게 더 이상 기타를 가르쳐줄만한 선생이 없었다.
#일본에서 온 기타 선생님
어느 날 집에 아버지의 동료 선생이 찾아왔다. 배울 데가 없어 기타 실력이 더 늘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가 “우리 동네에 기타를 귀신같이 잘 치는 일본 태생 젊은 귀국자 여성이 살고 있다”며 함께 가보자고 했다.

동네에선 그 여성이 기타를 치는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명절에 딱 한 번 남편 동료들을 위해 기타를 들었는데 모두 넋을 잃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그 여성은 일본 명문대에서 기타를 전공했고,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남편도 그 기타 연주에 반해 청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함흥에 온 뒤로 여성은 기타를 절대 잡지 않았다.

은지는 그 선생과 함께 함흥의 중심부 동흥산구역에 있는 귀국자 여성의 집으로 찾아갔다. 얼굴이 유난히 흰 젊은 여성이 나왔다.

그녀는 “이 애를 제자로 좀 받아주라”는 제안에 손사래를 쳤다. “내가 기타를 치는 것을 알리고 싶지도 않고, 제자를 키울 생각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친구는 끈질겼다. 그래도 2시간이나 자전거 뒤에 앉아 온 애인데 기타 치는 것을 짧게라도 보여주면 안 되겠냐고 사정했다.

그 청까진 거절하기 어려웠던지 여인은 방에 들어가 기타를 들고 나왔다. 그때 은지는 제대로 된 클래식 기타를 처음 보았다. 여인의 시범연주는 딱 1분에 그쳤다. 그 1분은 은지에겐 새로운 세계였다.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은 기타도 아니더라고요. 우선 기타에서 얼마나 예쁘고 따뜻한 소리가 나는지 정말 그때 느낀 감정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리고 몸과 기타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 뭔지 느꼈어요. 어린 아이에게 짧게 보여주는 것임에도 그 분은 온 정성과 마음을 들여 기타를 연주하더군요.”

기타 연주까지 들으니 집에 그냥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 교수와 함께 은지는 제발 좀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웃으면서 “애가 이렇게 원하니 제가 선뜻 거절은 못하겠지만 대신 6개월짜리 숙제를 내줄테니 그걸 해 오면 가르칠게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내준 숙제는 클래식기타 기본자세를 잡기 위한 반음계스케일 연습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자세 교정으로 기타의 왼손, 오른손의 모양과 각도, 줄 높이와의 거리, 손톱 모양 등 자세한 테크닉 연습 방법이었다. 이걸 못하면 기타를 정확하게 칠 수가 없다면서 시범을 보여준 뒤 6개월 동안 훈련해 교정하고 와야 한다고 했다.

얼핏 간단한 숙제였지만, 같은 동작과 한 자세를 매일 반복해야 하는 매우 지겨운 숙제이기도 했다.

은지는 집에 돌아와 그녀가 보여준 시범대로 몸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쉽진 않았지만 꼭 그녀에게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6개월 뒤에 다시 찾아갔을 때 여인은 놀랐다.

“아니. 어린 애가 이렇게 지겨운 연습을 해서 올 줄은 몰랐네요. 해올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이제부터 1주일에 한 번씩 오세요.”

그때부터 중학교 6년 내내 은지는 여인의 집에 매주 빠지지 않고 찾아가, 갈 때마다 2시간씩 레슨을 받았다. 자전거로 2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여서 아버지가 꼬박꼬박 자전거 뒤에 딸을 태우고 다녔다. 포장도로가 아니어서 엉덩이가 너무 아팠지만 은지는 참고 참았다. 없는 살림이지만 쌀이나 돈을 들고 찾아가 레슨비를 대신했다.

6년 동안 은지는 평생의 기초가 될 자세를 바로 잡았고 실력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선생은 북한에서 공식 출판된 교재 이상을 절대 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허용되지 않은 기타 연주 때문에 큰 고초를 겪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은지는 6년 동안 중학교 음악소조에선 기타반을 책임졌고, 함흥대극장에서 학교를 대신해 독주회도 여러 번 가졌다. 음악에 전념하면서도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최우등으로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2020년 경치 수려한 경기도의 한 공원에서 기타 연주에 빠진 모습.


#아버지의 구속
중학교를 졸업하면 예술대학에 가는 것이 은지의 목표였다. 그가 예술대학에 진학했다면 서울에서 그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흘러가는 인생은 없는 법이다. 그런 예측불허가 수시로 가져오는 좌절과 극복의 인생사 덕분에 인생은 빛나기도 하고, 또는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마무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은지의 경우 하필 중학교 졸업 몇 달 전에 최악의 운명과 마주쳤다. 아버지가 보위부에 체포돼 끌려갔던 것. 당시 대학에 새 컴퓨터가 대량으로 들어왔는데, 그 컴퓨터로 학생들과 함께 한국 드라마를 본 것을 누군가 밀고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보위부에서 취조를 받는 동안 대학에 보위부 ‘검열그루빠(검열단)’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아버지의 과거 행적을 탈탈 털어 별 것을 다 걸고 들었다.

한국 드라마를 본 것은 감옥에 갈 죄였지만, 천만다행으로 아버지는 몇 달쯤 있다가 풀려났다. 아버지는 노동당에서 관리하는 통일 대비용 예비 간부였기 때문이었다.

은지의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당진 출신이었다. 작은 할아버지, 고모할머니 모두 남쪽에 살고 있었다. 은지의 아버지는 노동당에서 발행하는 충청남도 교육부 고위간부 임명장을 갖고 있었다. 북한은 남한 연고자 중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통일되면 남쪽에 파견해 활동할 수 있는 임명장을 오래 전에 수여했다. 가령 충청남도의 경우 북한에 사는 충남 출신의 누군가가 충남 도당책임비서, 충남 인민위원회 위원장, 충남 보안서장, 충남 교육비서 등의 임명장을 이미 받아놓고 사는 것이다.

정치적 처벌은 면했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벌금형과 함께 동격조동이라는 조치로 전문학교 교장으로 옮겨갔다. 은지 집에 부과된 벌금은 집을 다 팔아도 모자라는 액수였다. 여기저기 돈을 빌려 내다보니 빚만 가득 지게 됐다.

전문학교는 함흥 시내에 있었다. 은지 부모는 집을 팔고 함흥 시내로 이사와 작은 집에서 동거살이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명색이 교장이긴 했지만 뇌물을 받을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얼마쯤 뒤부터 빚 독촉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시장에 나가 음료수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했던 언니도 직장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도와 시장 장사를 시작했다. 이런 환경에서 은지는 예술대학을 갈 수가 없었다.
#유치원 음악선생님
세상은 꼭 죽으란 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가 찾아와 솔깃한 제안을 했다.

당시 함흥에는 유치원 음악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교원양성소에 음악교사 양성을 위한 1년 반짜리 단기 속성반이 생겨났다. 원래 유치원 교사가 되려면 4년제 교원대학을 졸업해야 하지만, 음악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1년 반만 가르치고 유치원 교사 자격을 수여하기로 한 것이다. 속성반에 입학하려면 유치원 원장의 추천이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자기가 어느 원장을 잘 아니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유치원 교사, 특히 음악교사는 젊은 여성들에겐 꿈의 직업이다. 중학교나 초등학교 선생보다 유치원 음악교사가 훨씬 인기가 좋았다.

북한에선 돈이 있는 집 자식들은 거의 대다수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하게 한다. 즉 유치원 시절인데, 부모들은 아이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또는 파악하기 위해 음악 선생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과외는 필수고, 자식을 잘 봐달라는 뇌물의 액수도 엄청나다. 게다가 유치원은 2년 만에 졸업시킨다. 2년 뒤면 다시 새로운 학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에선 유치원 음악교사 2년이면 시집갈 준비를 끝낸다는 말이 있다.

은지가 모 원장의 추천을 받아 강습소 입학시험을 치러 갔더니 입학 정원은 20명인데, 함흥에서 음악을 전공한 중학교 졸업 학년 여학생들은 다 온 듯했다. 은지는 당당하게 합격했다. 집이 좁아 추천해 준 유치원의 기숙사에서 살며 학교를 다녔다.

동창생들은 모두 달러를 용돈으로 쓰는, 잘 사는 집 딸들이었다. 악기나 옷, 화장품은 당연히 수준차이가 컸다. 이번에도 은지는 실력을 키우는 것밖에 내세울 것이 없었다.

1년 반을 피타게 연습만 하다가 졸업시험을 치게 됐다. 전공 연주 외에 발풍금(피아노), 무용, 동화읽기가 졸업시험 과목이었다. 은지는 일등으로 졸업했다. 연주가 자신 있었던 것도 있었지만, 어렸을 때 5년 동안 무용을 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가 최우수 점수를 받게 되자 함흥에서 제일 큰 유치원 원장이 그에게 스카웃 제안을 했다. 하지만 은지는 자신을 추천해주고 기숙사까지 내준 유치원을 택했다.

2005년 은지는 만 18세에 유치원 음악선생이 됐다. 주변에서 모두 부러워했다. 유치원 선생이 되니 왜 이 직업이 그렇게 선망 받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처음 맡은 음악반 학생이 10명이었는데, 학부모들의 직업은 무역하는 집, 장사하는 집, 간부집 등으로 다양했지만, 한마디로 함흥에서 잘 나가는 돈 있는 집 자식들이었다. 학부모들이 자녀를 잘 부탁한다며 경쟁적으로 찾아와서 용돈을 찔러주고, 좋은 화장품과 옷을 사왔다. 매일 선생님 도시락까지 사오는 아이들만 7~8명이었다. 은지는 이 도시락을 들고 집에 가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좋았던 것도 잠시. 점점 유치원 선생일이 질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배울 때는 몰랐지만, 선생이 돼서 말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과 씨름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게다가 교수안을 밤새 써서 내야 했다. 오전에는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음악을 가르치고 밤에는 손으로 교수안을 작성하는 일이 이어졌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음악을 연주할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2011년 한국 입국 초기 사진


#탈북
교사로 임명돼 반년쯤 지난 어느 날. 중국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학부형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니, 선생님은 할아버지 가족이 다 한국에 있다면서요. 중국 가서 할아버지 친척을 찾아 도움을 받으면 금방 부자가 될 텐데, 왜 이러고 있어요. 내가 중국까지 안전하게 가서 친척을 찾게 도와줄게요.”

은지의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틈만 나면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율사리 ○○번지, 남동생 유 아무개, 여동생 유 아무개’를 외우게 했다. 자신이 못가면 너희라도 가서 자신의 형제를 꼭 찾으라는 당부였다. 할아버지는 손녀가 유치원 선생이 된 것을 보지 못하고 이산의 한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은지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때 이미 한국 드라마나 중국 드라마를 봤던 터라 외부 세계에 대한 환상이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가 중국에 가서 삼촌과 고모를 찾으면 좋겠지만 이미 보위부에 잡혀 혼이 나고, 교장이란 현직에도 있어 절대 가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몰래 가서 할아버지를 찾아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지.”

은지는 학부형에게 중국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학부형은 자기 회사 회계원으로 꾸며 국경까지 갈 수 있는 여행증을 만들어왔다. 2006년 3월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은지는 아무 말도 없이, 가족에게도 중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길을 나섰다. 떠날 때는 한두 달이면 돌아올 줄 알았다.

북중 국경까지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도착하니 국경경비대 장교가 마중 나와 밤에 강을 건네주었고, 허리까지 오는 강을 건너니 중국에서 차가 마중 나와 그를 태우고 연길로 들어갔다. 모두 학부형이 만들어준 루트였다.

연길까지 도착하는 동안 19세 은지는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드디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행복했다.

행복은 연길에 들어가자마자 깨졌다. 차에서 내려 어느 집에 들어가니 단칸방이었다. 그 집에서 40대 중후반 부부와 은지보다 한 살 많은 딸이 살고 있었다. 잠시 이 집에서 머물다 다른 곳에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집에서 한국 친척을 찾아준다는 것이었다.

도착했을 때 집주인 여인이 반찬 몇 개와 밥을 내왔는데, 양이 몇 숟가락 정도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다 먹으니 또 그만큼 내왔다. 그렇게 무려 다섯 번 밥을 퍼오니 장난하는 줄 알았다. 중국은 잘 살고, 기름진 음식에 배불리 먹는 줄 알았는데 정작 와보니 그게 아니었다. 환상이 깨졌다.

자유를 얻었다고 좋아했는데 하루 종일 단칸방에 머물며 살아야 했다. 집 주인은 한국과 연락하며 친척을 찾느라 열심히 노력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한국을 꿈꾸다
그동안 은지는 컴퓨터도 배우고, 채팅도 배우고 살았는데, 두 달 넘게 친척을 못 찾으니 집주인들에게 눈치가 보였다. 그렇다고 북한에 빈손으로 돌아가긴 싫었다.

길지 않은 동안 은지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중국에 탈북자가 엄청 많이 숨어살고, 연길 주변 산에도 탈북자들이 가득 숨어있다는 것, 중국에서 체포돼 북한으로 끌려가면 큰 고초를 겪게 된다는 것도 다 처음 알았다. 처음엔 거짓말인줄 알았지만, 나중엔 내가 북한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때 집주인들이 “김일성, 김정일이 나쁜 놈”이라고 해서 너무 가슴이 떨렸는데 두 달쯤 지나니 대수롭지 않게 듣게 됐다.

마침 머물던 집에는 한국 위성방송이 설치돼 있어 한국TV도 계속 보게 됐다.

처음 듣는 서울말은 귀에 살살 녹았다. 한국의 거리는 화려했다. 왜 조선족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한국에 가겠다고 하는지도 이해됐다. 기타를 사서 한국 음악방송을 들으며 악보를 적은 뒤 따라 치기도 했다. 한국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그 집에서 계속 머물기도 눈치가 보였다.

두 달이 넘자 그는 집 주변 어느 식당에 찾아갔다.

“북한에서 왔는데 알바를 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사장이 어이없이 쳐다보더니 “오자마자 자기 입으로 북에서 왔다는 여자는 처음 봤다”며 “신변보호는 못해주겠는데 일하겠으면 해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식당은 현지에서 유명한 식당이었다. 공안도 오고, 북한 사람도 왔다. 종업원은 모두 한족이었고 단 한 명만 조선족이었다. 은지는 머물던 집에서 나와 그 조선족과 함께 한 방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한달도 가지 못했다.

손님들이 와서 웃으며 “너 연변 사람 아니지” “어디서 왔냐”고 자꾸 물었다. 은지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그런 것이다. 누가 신고라도 하면 잡혀간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함께 있던 종업원이 제안했다. 자기 친구가 커피숍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다른 대도시로 옮겨갈 생각이니 그곳에 가서 일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커피숍 사장이 발이 넓고 공안도 다 친해서 잡혀가진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은지는 커피숍으로 옮겼다. 몇 달만 일할 생각이었는데 그곳에서 무려 4년이나 있게 됐다.

커피숍 사장은 총각이었다. 형제들도 다 연변에서 잘 나갔다. 사장은 은지에게 함께 살자며 중국 신분증까지 다 해주겠다고 했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

사장은 약속을 지켰다. 중국 신분증을 만들어주었다. 가짜가 아닌 진짜였다. 지금은 중국도 전자 등록 체계가 잘 돼 있어 불가능하지만, 당시엔 누가 사망하면 사망 신고를 하지 않고 호구를 팔았고, 그 호구를 사서 사진만 바꾼 뒤 그 사람의 이름으로 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면 잡힐 일이 없었다. 신분도 안정되고, 사랑해주는 남자도 만나 모든 것이 다 잘 풀린 듯 했지만, 은지는 그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악을 계속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다. 한국이 자석처럼 계속 끌었다. 그는 애인을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애인도 한국으로 가라고 승낙했다.

2021년 남북 음악인 합동공연 중 연주에 몰두한 모습.


#“노력하면 된다면서요.”
2010년 10월 은지는 중국 여권을 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조사를 받고 2011년 3월 사회에 나왔다. 서울에 정착하고 싶었지만, 하나원 추첨에서 떨어져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를 대구에 가게 됐다.

한국에 온 이유가 음악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것이었던 것만큼 어느 정도 자리 잡자마자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는 대학을 찾았다. 서울로 가서 좋은 대학에 다니고 싶었지만, 돈도 없고, 집도 없어 불가능해보였다. 2012년 그는 대구에 있는 계명문화대 실용음악학부에 입학해 2년 뒤 졸업했다. 일단 남쪽의 음악 세계에 부딪쳐 보고 싶은 욕망이 컸다.

“실제로 입학해 수업을 접하니 북한과 음악 이론은 별로 차이가 없었는데 남북의 음악 용어가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에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말 생소했습니다.”

전문대에 입학해 한국 음악에 입문했지만 여전히 목마르는 갈증은 남아있었다.

계명대는 일렉 기타를 전공으로 했다. 원래는 클래식 기타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한국에 와서 보니 음악에 다양한 장르가 있다는 게 놀라워서 재즈를 선택했다. 일렉 기타는 은지가 지금까지 배워 온 클래식 기타와는 전혀 다른 장르, 즉 기타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구기 종목으로 치면 배구와 축구의 차이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장르다.

계명대를 졸업한 뒤 클래식 기타도 더 파고들고자 알아보니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가 최고라고 했다.

“그래,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왕이면 저기에 입학해 공부하자. 아버지 때문에 평양의 예술대학엔 가지 못했지만 서울에 와선 한국 최고의 예술대학엔 가야겠다.”

그러기까지 넘어야 할 산은 많았다. 일단 한예종은 탈북민 특례입학이 없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3만5000여 명 중 한예종 입학생도 전무했다. 한예종의 클래식 기타 전공은 매년 70~80명이 지원해 3~4명만 입학한다. 학교 때부터 그곳만 목표로 기타를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도 이곳에 지원해 입학할 확률이 5%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알게 되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그는 한예종을 목표로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온 이유를 증명하고 싶었고, 또 이곳은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고 하는데 과연 되는지 내 한계에 도전하고 싶기도 했어요.”

두 번째 어려움은 서울에 정착할 수 있는 돈이었다. 정부에서 대구의 임대주택을 서울로 바꿔주지 않아 그는 서울의 반지하 주택을 월세로 얻었다. 2015년 서울로 올라온 은지는 처음 1년은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예종 입학을 위해선 수많은 시간을 연습에 투자해야 하는데 연습하는 동안 먹고 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첫 일자리는 쿠팡 물류센터에서 박스를 포장하는 일이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일당이 높았다. 그러나 몇 달 해보니 손가락에 무리가 왔다. 연주자에게 손가락은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손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았다. 그래서 냉동 창고에서 식품 나르는 일을 얻었다. 한여름에도 고드름이 지는 냉동실에서 두꺼운 옷을 입고 작업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박스 포장보다는 손에 무리가 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이마트, 호텔 서빙 등 각종 알바 자리를 찾아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그의 눈에는 오직 한예종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예종 입학식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 유은지

#탈북민 최초의 한예종 입학
2016년 그는 한예종 시험에 도전했다. 실패였다. 떨어진 이유를 분석해봤다. 돈을 버느라 연습을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다른 지원자들은 하루 종일 연주만 훈련해 오는데 그가 낼 수 있는 훈련 시간은 고작 하루에 몇 시간뿐이었다.

둘째는 시험 정보도 없고, 레슨을 받지 못했던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선생을 만나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특히 한예종에 입학하려면 최고 수준의 레슨 선생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데 그는 맨땅에 헤딩한 셈이다. 다른 지원자들은 훌륭한 레슨 선생을 만나 그 아래서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이 모여 하루 종일 고강도 연습을 하다보니 실력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은지는 1차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여전히 레슨을 받을 상황이 못 됐다. 돈을 벌어야했고, 그러다보니 시간도 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연습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울에선 기타 연습을 집에서 할 수 없었다. 연습실이 없어서 여름이면 모기에 뜯기며 공원에서 연습을 했고, 겨울이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먼 곳의 연주실을 찾아다녔다. 남쪽에 왔지만 어두운 창고 안에서 연습을 하던 10살 때보다 별로 환경이 나아지지 않았다. 한 시간이라도 더 연습 시간을 짜내려고 일자리를 최대한 집 근처에서 찾았고,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뛰어서 돌아왔다.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해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쳤다. 1차에 70여명이 지원했는데 은지는 10명만 뽑는 2차 시험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최종 3명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3차 시험에서는 피아노 연주를 듣고 악보에 옮겨 적는 청음과, 음악이론 시험이 나온다. 은지는 이건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2차 시험인데, 이번에 떨어진 것은 연습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결론 냈다. 그는 2차 시험에 떨어진 뒤 친구에게서 800만 원을 빌렸다. 일하러 다니지 않고 집중적으로 연습만 하기 위해서였다. 말 그대로 올인한 것이다.

2018년 세 번째 시험에서도 순조롭게 1차 시험을 통과했다. 두 번째 시험의 연주를 마치고 나오는데 느낌이 좋았다.

“그 이전까진 항상 연주를 마치고 나오면 아쉬움이 있었어요. 긴장돼 나를 다 보여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죠. 그런데 그날엔 나를 다 보여주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어요. 심사위원들의 표정을 보니 이번엔 붙겠다는 생각이 딱 들더군요.”

그의 생각대로 합격자 명단엔 유은지라는 이름이 올라 있었다. 5%의 확률을 3번 만에 통과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한예종에 입학한 첫 탈북민이 됐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몇 시간을 펑펑 울었다. 북한과 중국, 남쪽에서 쌓이고 쌓인 오랜 마음의 응어리를 눈물에 실어 날려버렸다.

2021년 한 공연 연주를 앞두고 찍은 프로필 사진.

#평양의 클래식 기타 선생님
2019년 3월 첫 학기를 시작했다. 3년 동안 열심히 바라보고 달린 결과를 얻었지만, 대학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나이 만 32세. 동창들은 띠동갑이었고, 대학 전체로 봐도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다. 거기에 한국 최고의 예술학교답게 교육 수준도 너무 높았다.

“여기서 공부하니 북한에서 배운 클래식은 클래식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음악사 등의 이론도 그에겐 넘기 쉬운 과목이 아니었다.

“여유가 있는 집 학생들은 학점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실기에만 집중해 원없이 연습만 하는데, 그게 참 부러워요, 저는 그럴 형편이 못돼요. 학점을 잘 받아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2학기부터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대학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지 못한 것도 진한 아쉬움이다. 그럼에도 나이 많은 자신을 ‘왕따’시키지 않고 함께 놀아주는 동창들이 참 고맙다. 한예종 학생이 되니 과외를 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점이다. 학원 타임 강사로 레슨을 해줄 수 있으니 이제 더는 물류센터에 가서 포장을 하거나 얼음 창고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어느 덧 은지는 대학 생활의 마지막 학기를 맞고 있다. 졸업해도 진로에 대한 고민은 남아있다. 내년에 졸업하면 36세인데 무엇을 하고 싶을까.

“욕심만 같아선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세계적인 음악을 더 배우고 싶어요. 한예종을 다니니 또 줄리아드 음대에 가고 싶기도 해요. 물론 지금은 언감생심, 그럴 형편이 아닌 것은 잘 압니다만, 꿈이야 크게 가져야죠. 아버지는 늘 긍정적 성격이었어요.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괜찮아 굶어죽진 않을거니’ 라는 태도였는데, 제가 아버지 성격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저도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을 보면 말이 되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이만큼 왔으니 앞으로도 잘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를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에게 기타는 절대 버릴 수 없는 운명과 같은 친구다. 기타만 쥐면 외로움도 사라지고, 배고픔도 사라지고, 두려움도 사라진다. 특히 클래식 기타는 그에겐 우주 자체다.

“베토벤은 클래식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했어요. 현악기 중에 클래식 기타만큼 어려운 악기는 없지만, 또 이것만큼 음색이나 화음 등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악기는 없습니다. 클래식 기타는 죽을 때까지 완전히 익혔다는 말을 할 수 없어요. 세계적 대가들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해요. 하루 연습을 건너뛰면 바로 티가 나요.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클래식 기타를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는 기타의 바다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운명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열심히 배워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통일이 되면 저는 평양음악무용대학에 가서 클래식 기타를 제대로 배워주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제가 거길 가고 싶었지만 못 갔잖아요. 지금 보면 오히려 더 잘된 거죠. 나중에 평양에 가서 ‘얘들아 선생님이 세상으로 일찍 나가 그래도 열심히 많이 공부하고 왔다. 클래식은 이런 거다’고 가르치고 싶죠.”

유은지 교수가 북한 음악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클래식은 이런거다”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봤다. 참 많은 곡절을 넘었지만 그는 지금 평균 수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5세에 불과하다. 훗날 어느 날인가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그런 일이 분명 일어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