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신약 개발에 사용하는 플랫폼 전 과정 중 후보물질 도출에만 사용, 약품 개발로 승인 받은 사례는 전무 전문가들 “AI 활용 장점은 충분” 양적 자료 처리에는 인공지능, 임상시험은 사람이 맡아야 효율적
고속 대량 스크리닝(HTS) 기법 중 후보물질을 분주하는 모습. 약물 후보물질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고 평가되는 HTS 기법에 인공지능(AI) 플랫폼이 접목되며 다시 한번 신약개발의 속도를 높였다. 미국 국립암연구소 제공
2019년 홍콩 바이오기업 인실리코메디신과 캐나다 토론토대 등 국제공동연구팀은 인공지능(AI) 플랫폼으로 46일 만에 섬유증 치료제 후보물질을 도출해 냈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 생명공학’에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 소식이 없었다. 인실리코메디신은 올해 7월에야 섬유증 치료제 최종 후보물질(INS018_055)을 임상 1상 지원자에게 투여했다고 발표했다.
AI를 이용하면 10년 이상 걸리던 신약개발 속도가 획기적으로 단축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나오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AI를 통해 어떤 물질이 신약이 될 수 있는지 찾아내는 ‘스크리닝’을 빠르게 할 수는 있지만 실제 신약 개발에는 임상 절차 등 지루한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AI 신약 개발 플랫폼, 약물 스크리닝 과정에 한정
AI 신약 개발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과 함께 급격히 성장했다. 순식간에 확산되는 팬데믹을 억제하려면 새로운 백신과 치료제 개발 기간을 최대한 앞당겨야 한다는 데 전 세계 과학계가 공감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아직까지 AI 플랫폼으로 약물을 개발해 승인 받은 사례는 없다. 신약 개발 AI 플랫폼이 대부분 약물 스크리닝 과정에 한정됐기 때문이다. 약물 스크리닝은 신약 후보물질을 도출하는 과정 중 하나로 신약 개발 전 과정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부분은 아니다. 기존에도 많은 양의 화합물을 한 번에 시험할 수 있는 고속 대용량 스크리닝(HTS) 기법이 정립돼 있다.
전체 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부분은 일반적으로 전 임상시험·임상시험이지만 여기에 적용할 수 있는 AI 플랫폼은 아직 이론 수준에 머무는 상태다. 임상시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환자 선별용 AI 알고리즘 등이 개발 중이지만 아직 현실화하기에는 요원하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의 AI신약개발자문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황대희 서울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AI를 적용하려면 약효, 독성에 대한 충분한 데이터 확보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 AI 플랫폼은 신약 개발 ‘대체자’가 아닌 ‘조력자’
하지만 신약 개발에 있어 AI 활용의 장점은 분명히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기존의 고속 대용량 스크리닝 기법을 활용하려면 화합물과 병원체 단백질의 실물을 준비할 수 있어야 실험이 가능하지만 AI를 활용하면 실험적 준비가 돼 있지 않아도 화합물과 단백질 구조를 바탕으로 효과를 검증할 수 있다.실제 AI 신약 개발 전문가들은 AI로 기존의 신약 개발을 대체하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과 AI의 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국내 신약 개발 AI 플랫폼을 운영하는 신테카바이오의 신지윤 책임연구원은 “AI는 인간이 가능한 규모 이상의 계산을 빠르게 해낼 수 있어 신약 개발 중 약물 스크리닝처럼 ‘양으로 승부해야 하는’ 과정에 최적화된 기술”이라며 “같은 시간 내 더 많은 화합물을 검증하면 후보물질을 도출할 확률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반면 임상시험의 경우 인간에게 직접 후보물질을 투여해 약효를 확인해야 하는 만큼 AI가 대체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만 AI가 연구자가 하는 실험의 효율을 극대화하도록 도울 수는 있다. 최근에는 임상 시뮬레이션 등 임상시험용 AI 플랫폼도 개발되고 있다. 지난해 6월 영국 리즈대 연구팀은 컴퓨터 임상 시뮬레이션이 뇌동맥류 치료용 의료기기의 임상평가를 재현할 수 있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하기도 했다. 신 책임연구원은 “전반적인 신약 개발 과정을 모두 AI로 대체하는 것보다는 AI가 유리한 과정은 AI가, 사람이 유리한 과정은 사람이 수행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