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신선을 보았는가
단원 김홍도는 선객도(仙客圖)에 신선과 장수의 다양한 상징을 그려 넣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대중 매체에 글을 쓰다 보면, 독자 편지를 받을 때가 있다. 그중에는 단순히 자기 독후감을 적은 것도 있고, 오탈자를 지적하는 것도 있고, 일방적인 비방을 늘어놓는 것도 있고, 황홀한 찬사를 써서 잠시 숙연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편지도 있다. 이를테면 다짜고짜 “지난밤에 고마웠어요”라는 메시지.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편지 보낸 사람이 누군지 모를 뿐 아니라, 지난밤에 나는 혼자 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람.
이런 수수께끼 같은 편지를 이해하려면, 인간이 반드시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과학과 합리성은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삶의 일부다. 인간은 하루 24시간을 보내면서 잠깐 의식적으로 합리적인 행동을 할 뿐, 대부분 습관적인 행동이나 망상이나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보낸다. 적어도 나와 내 주변 사람은 그렇다. 그중 어떤 망상은 해롭기도 하지만, 또 다른 망상은 예술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헛소리는 삶의 활력이 되기도 한다.
16세기 명나라 시대에서 전해진 동방삭의 초상화(왼쪽·작자 미상). 삼천갑자(18만 년)를 산다는 동방삭은 선녀 서왕모의 과수원에서 불사(不死)의 마법 복숭아를 훔친 전설로 유명하다. 오른쪽 그림은 조선 후기 화가 백은배가 그린 백묘 신선도(白描神仙圖). 통상 수염 기른 노인으로 묘사되는 신선은 신과 인간 사이에 위치하며 장수와 득도의 상징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현대가 되어 자칭 신선은 줄었으나, 신선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앞일을 예언하기도 하고, 점을 보아주기도 하며, 사람들의 존경과 돈을 끌어모으는 이들. 이른바 도사나 점쟁이나 재야의 지략가다. 자기 현재가 불안하고, 미래가 궁금한 사람들은 그들을 찾아가 아낌없이 복채를 지불하고, 자기 팔자를 알려고 들고, 한국의 앞날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이들은 논리적 토론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권위적인 진단과 예언을 듣고자 온 것이므로, 도사나 점쟁이도 그에 걸맞은 외모를 갖추는 것이 좋다. 머리를 확 밀거나, 아니면 길게 기르거나.
외모만큼 중요한 것이 수사법이다. 아까 그 사업가는 내게 강연할 때 수사법도 바꾸라고 조언했다. 대학교수랍시고 논리적인 주장을 조목조목 늘어놓으면, 사람들이 경청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사람들 마음을 휘어잡으려면, 논리적이 아니라 권위적으로 말해야 하오.” 현대판 도사 혹은 점쟁이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불안에 시달린 나머지 생면부지의 사람을 찾아온 이에게 논리적인 말을 늘어놓아 보아야 별 소용 없다.
그래서일까. 시중의 점쟁이들은 대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일단 반말을 한다. 문 열고 들어오는 고객에게 대뜸 그러는 거다. “왔어?” 점쟁이가 반말을 한다고 해서, “응, 왔어” 이렇게 반말로 응답할 고객은 드물다. 누구는 반말을 하고, 누구는 존댓말을 한다면, 그 둘 사이에 위계가 이미 생긴 것이다. 이제 윗사람이 하는 말은 어지간하면 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점쟁이가 고객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단정하듯이 떠들어댄다. 오, 그럴듯한데. 역시 용해.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남편에 대해서도 한마디 한다. “당신 남편, 외롭고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야. 잘 보살펴.” 고객이 의아해서 반문한다. “우리 그이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적극적인 성격인데요?” 자기 단언이 틀렸다고 이 대목에서 점쟁이가 위축되면 권위가 실추된다. 차라리 냅다 소리를 지르는 거다. “네가 남편에 대해 뭘 알아! 같이 산다고 다 아는 줄 알아!”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