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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R&D 예산은 어디로 갔을까?”

입력 | 2022-09-27 03:00:00

ETRI 이순석 박사 ‘공학의 시간’ 출간
디지털 건축 통한 디자인 해법 제시




머리를 한껏 길러 뒤통수에서 질끈 동여맸다. 2013년 미국 실리콘밸리 연수 때의 일이다. 미국인과 잘 섞이기 위해서였는데 귀국해 고민하다 그대로 뒀다. “좀 멋대로 살아보자”는 생각에서다.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이순석 박사(지능네트워크연구실 책임연구원·사진)의 말총머리는 이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괴짜는 그때의 결심대로 산다. 실험실만 지키지 않고 각종 과학기술 현안 논쟁과 지역 운동에 참여한다. 2015년부터는 커뮤니티 ‘새통사(새로운 통찰을 모색하는 사람들)’를 운영한다. 과학, 인문, 예술의 융합적 접근을 통해 통찰(insight)을 찾는 모임이다.

자신이 도달한 통찰은 ‘디지털’이었다. 전통산업에서 디지털산업으로, 물질 중심 세계에서 비물질 세계로 이동하는 대전환기의 핵심에는 디지털이 있다는 것이다. 초미세 단위 ‘나노(nano)’의 발견이 그랬듯이, 디지털로 환원하면 견고해 보이는 세계도 해체와 창조가 가능했다. 그래서 ‘디지털 건축가’를 자임하면서 이런 관점의 공유에 나섰다. 페이스북에 ‘디지털 세상 읽기’, ‘블록체인 참모습 찾아가기’ 등의 칼럼을 연재했다.

그가 머리를 한 번 더 질끈 묶고 ‘공학의 시간’(청림출판)을 펴냈다. 디지털 건축을 통해 세계를 원하는 대로 디자인하는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저술의 문제의식은 ‘그 많던 연구개발(R&D) 예산은 어디로 갔을까’다. 이 박사는 “지난 반세기의 국가 R&D 예산은 300조 원으로 어마어마한데, 왜 성과가 기대에 못 미쳤는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공학의 부재’에서 대답을 찾았다.

기술과 공학의 차이는 뭘까? 비즈니스에 기술을 더하는 것은 기존 기술의 방식인 반면 기술을 전제로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조하는 새판 짜기는 공학의 방식이다. 이 박사는 “‘네이티브 컴퓨팅’ 기술이 아이디어만 있으면 무비용 창업, 무인 회사도 가능하게 했다”며 “이제 공학을 통해 구조적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가 말하는 공학은 한마디로 ‘설계도 있는 기술’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과 궁리, 논리적 판짜기가 필요하다.

이 박사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면 공학의 할 일이 많다”며 “공학이야말로 기술이 만들어낸 기후, 식량, 자원, 생태계, 전염병 등 우리 시대의 동시다발적 위기에 해법을 던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