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우크라 점령지 병합] 주민투표 종료 하루만에 병합 선언… 젤렌스키 “코미디로 영토 훔치려 해” 美, 러 규탄 안보리 결의안 발의… 우크라에 11억달러 추가 군사지원 “반대한 주민 끌려갔다는 소문 퍼져… 점령지서 징집돼 총알받이 될 것”
점령지에 내걸린 러시아 국기 27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주 루한스크시의 한 아파트에서 인부들이 러시아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날 우크라이나 동남부 점령지 4곳의 병합 주민투표 결과 절대 다수가 찬성했다며 이 지역을 러시아 영토라고 선언했다. 루한스크=AP 뉴시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남부의 점령지 4곳을 병합하기 위한 주민투표가 끝난 지 하루 만인 28일(현지 시간) “99%가 병합에 찬성했다”며 병합을 선언했다. 100%에 육박하는 신뢰하기 어려운 찬성률을 주장하는 러시아에 대해 미국과 영국 등 서방에서 비밀투표 원칙 등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강압적으로 진행돼 국제법을 위반한 ‘가짜 투표’라는 규탄이 잇따르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짝퉁 투표로도 불리지 못할 코미디(farce)로 영토를 훔치려 한다”고 반발했다.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텔레그램에 “투표 결과는 명확하다. 러시아 조국으로 온 걸 환영한다”는 글을 올렸다. 러시아 관영 리아노보스티통신은 27일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주, 자포리자와 헤르손주 등 4곳에서 병합을 위한 주민투표 결과 찬성률이 각각 99.23%, 98.42%, 93.11%, 87.05%로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 美 “러 병합 투표는 판도라 상자”
특히 토머스그린필드 대사는 “러시아의 가짜 주민투표가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다시는 닫을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의 병합 투표를 국제사회가 인정하면 러시아가 병합된 영토 수호를 명분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러시아 규탄 안보리 결의안은 러시아가 비토권을 보유한 상임이사국이라 채택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미국은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할 때 자동으로 소집되는 유엔 총회에서 러시아에 대한 규탄을 다시 공론화할 수 있다는 복안이다.
제임스 카리우키 주유엔 영국 부대사는 “총구 앞에서 실시되는 투표는 전혀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못하다”고 비판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도 “러시아의 가짜 투표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안보리 화상 연설을 통해 러시아의 상임이사국 퇴출과 추가 대러시아 제재를 촉구했다. 그는 “러시아가 세계인의 눈앞에서 ‘주민투표’라고 불리는 노골적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며 “주민들은 기관총 위협을 받으면서 TV 방송 화면에 쓸 사진을 찍기 위해 억지로 투표용지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 “점령지 주민들 총알받이로 쓰려는 것”
국제사회가 반발하는 이유는 병합 주민투표가 국제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찬반이 표시된 투표용지를 접지 않은 채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투명 투표함에 넣었다. 세르히 하이다이 우크라이나 루한스크 지역 군청장은 텔레그램에 “병합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딘가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고 올렸다. 우크라이나 당국자들은 러시아가 이번 투표를 근거로 들며 우크라이나인들을 러시아 군대에 징집할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에 점령당한 남부 자포리자주 멜리토폴의 이반 페도로우 전 시장은 “가짜 주민투표의 주요 목적은 우리 주민들을 동원해 총알받이로 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CNN이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점령지 행정부와 러시아 당국이 자포리자와 헤르손에서 징집할 수천 명의 우크라이나인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