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40대 의사 A 씨가 서울중앙지검 검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범에게 41억 원을 뜯긴 일이 있었다. 단일 보이스피싱 피해액으로 역대 최고액이었다. A 씨는 예금과 적금, 보험, 주식 해약금을 영업 창구에서 현금으로 인출한 뒤 보이스피싱범이 지정한 장소에서, 자칭 ‘금감원 직원’을 만나 이 돈을 건넸다. 최근 변호사와 연구원 등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를 상대로 10억 원 가까운 고액 피해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 역시 비슷한 유형이다.
▷보이스피싱의 원조는 계좌로 돈을 송금 받는 계좌이체형이다. 하지만 2015년부터 고액을 계좌로 송금하기 어렵게 하는 제도가 하나씩 만들어졌다. 신규계좌 개설자가 증빙서류를 제출하지 못하면 인터넷이나 모바일뱅킹, 현금자동입출금기(ATM)의 이체 한도를 하루 30만 원으로 제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때부터 영업 창구에서 본인이 직접 인출하면 한도가 없는 허점을 노린 대면편취형이 늘었다. 2년 전 대면편취형(1만5111건)이 처음으로 계좌이체형(1만596건)을 추월했다.
▷피해자를 직접 만나 돈을 뜯어내는 대면편취형은 분업화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점조직처럼 운영된다. 총책과 관리책의 지휘 아래 아르바이트생은 현금 수거와 송금, 인출 등으로 칸막이처럼 역할을 나눈다. 예를 들면 현금 수거 아르바이트생은 피해자로부터 돈 봉투를 전달받아 5% 정도를 수수료로 챙기고, 나머지를 보이스피싱범이 지정한 계좌에 입금한다. 그 돈을 인출해 총책이나 관리책에게 송금하는 아르바이트생도 있다. 수사기관의 추적도 어렵고, 적발되더라도 꼬리 자르기가 쉽다.
▷보이스피싱범은 자신들의 범죄 수법이 노출되거나 한계에 부닥치면 새 수법을 개발한다. 2006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이스피싱 범죄가 발생했는데, 당시엔 중국에서 걸려온 국제전화였다. 국제전화 식별 제도를 만들자 발신번호를 조작하는 중계기까지 만들어 피해자에게 접근했다. 범정부 차원에서 보이스피싱 대책을 29일 내놨지만 대면편취형에 대한 대응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고강도, 전방위 대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놈 목소리’에 당하는 피해자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