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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황규인]찰스 3세의 축구, 윤석열의 축구

입력 | 2022-09-30 03:00:00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한국은 동방예의지국답게 윤석열 대통령이 왼쪽 페이지에 조문록을 쓴 게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느라 바빴던 어느 날이었다. 영국 축구 전문 매체 ‘골닷컴’은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어떤 축구 팀을 응원하는지 소개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 절차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이런 기사가 버젓이 나오는 걸 보면 영국은 ‘신사의 나라’와는 거리가 먼 모양이다.

당연히 그렇지 않다.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라는 책에는 “야구팀 하나는 당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중대하게 바꿔 놓는다”는 구절이 나온다. 축구팀도 물론 그렇다. 골닷컴에 따르면 찰스 3세가 응원하는 팀은 번리 FC다. 버킹엄 궁전에서 번리 안방구장까지는 차로 4시간이 넘게 걸린다. 또 번리는 지난 시즌에도 1부 리그 20개 팀 중 18위에 그치면서 2부 리그로 떨어지는 등 강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찰스 3세는 어쩌다 이 팀 VIP 시즌 티켓 보유자가 됐을까.

찰스 3세는 “이 팀이 굉장히 험난한 시기를 거쳐 왔기 때문”이라며 “선수들이 포부와 자부심을 잃지 않도록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찰스 3세 역시 영국 역사상 최장 기간(64년) 왕세자 자리를 지키면서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거쳤다. 1, 2부 리그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번리를 보면서 찰스 3세는 자기 마음을 다스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국 언론은 총리가 바뀔 때도 응원팀 소개 기사를 내보낸다. 리즈 트러스 현 총리는 노리치 시티 FC 팬이다. 트러스 총리는 노퍽이 지역구이고, 노리치가 노퍽주 주도니까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단, 리즈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트러스 총리는 리즈 유나이티드를 응원한 적도 있다. 그는 경선 기간 “돈 레비 정신이 필요하다”고 연설하면서 리즈의 ‘리즈 시절’(과거의 황금기)을 이끈 감독 이름을 언급하기도 했다.

요컨대 영국에서 축구 그리고 스포츠는 ‘세계관’이고 ‘교양’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지만 미식축구 실력은 으뜸이었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17년 펴낸 자서전에 “델라웨어대 미식축구 팀은 모든 선수가 경기장 안팎에서 신사로 행동하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썼다.

반면 동방예의지국에서 스포츠와 신사 사이는 거리가 너무도 멀다. 조선 고종은 외국인들이 테니스 치는 걸 보고 “그렇게 힘든 일은 아랫것들에게 시키지 왜 그리 고생을 하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에도 해외순방에 나선 대통령이 비행기 안에서 축구를 보는 건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대통령이 발레를 봤다면 평가가 달랐을까.

이 소란을 지켜보면서 2018년 미국 대선 기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떠올랐다. 캠프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사진을 보면 클린턴 후보는 유세 비행기 안에서 시카고 컵스가 108년 만에 월드시리즈 정상을 차지하는 걸 보고 한껏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 언론 어디에서도 ‘그 중요한 순간 야구나 보고 있으니 선거에서 진 것’이라는 분석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