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열린 베를린 마라톤 대회 중 음료 배급대에서 엘리우드 킵초게에게 물병을 전달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봉사자 클라우스 헤닝 슐케 씨. 시속 20km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는 킵초게가 여러 사람들 속 자신을 빨리 알아보게 하기 위해 슐케 씨는 상의 전체를 형광색으로 휘감았다. 유튜브 중계화면 캡처
"베를린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나에게 물을 건네주신 분이다."
역사상 최고 마라토너로 손꼽히는 엘리우드 킵초게(38ㆍ케냐)는 지난달 25일 독일 베를린 마라톤에서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세계기록을 경신한 뒤 이렇게 말했다. 그는 대회 자원봉사자로 나섰던 클라우스 헤닝 슐케 씨(56)를 자신의 "영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슐케 씨는 이날 총 13차례에 걸쳐 킵초게에게 물병을 건넸다.
엘리우드 킵초게(오른쪽)가 마라톤 질주 중 클라우스 헤닝 슐케 씨가 건네는 물병을 낚아채고 있다.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선수들은 몸에 제때 영양분을 공급해줘야 시속 20km가 넘는 최고스피드를 떨어뜨리지 않고 유지할 수 있다. 유튜브 중계화면 캡처
풀코스를 뛰는 선수들이 받는 물병에는 탄수화물, 전해질 등 각자의 몸에 맞게 배합한 특별음료가 담겨있다. 하지만 대기록에 도전하는 킵초게에게 물병을 잘못 건네줄 경우 한끗 차이로 세계기록 달성 여부가 갈릴 수 있다. 또 선수마다 내용물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 물병을 제대로 받아야 레이스에서 최대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 킵초게 팀이 심혈을 기울여 물병을 건네는 자원봉사자를 찾은 이유다.
킵초게와 슐케 씨의 인연은 2017년에 시작됐다. 당시에는 슐케 씨가 '랜덤으로' 킵초게의 물병 담당자를 맡았다. 킵초게는 당시 우승했지만 비가 내린 궂은 날씨 때문에 세계기록은 세우지 못했다. 킵초게는 2018년 이 대회에 다시 나오면서 주최 측에 지난해와 똑같은 물병 봉사자를 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2018년 베를린 마라톤 당시 엘리우드 킵초게(오른쪽)와 클라우스 헤닝 슐케 씨(왼쪽). 트위터
2018년 베를린 마라톤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운 뒤 엘리우드 킵초게(왼쪽)는 자신의 이름표에 감사 메시지를 적어 클라우스 헤닝 슐케 씨(오른쪽)에 선물했다. 트위터
결국 2018년 대회에서 킵초게는 당시 세계최고기록인 2시간1분39초에 결승점을 통과했다. 경기 후 킵초게는 자신이 달고 뛴 이름표에 “당신이 없었다면 제 세계기록은 불가능했을 거예요”라고 편지를 적어 슐케 씨에게 선물했다.
올해 킵초게의 세 번째 베를린 마라톤 출전을 앞두고 슐케 씨는 부담감에 잠까지 설쳤다. 슐케 씨는 “대회 하루 전에 떨린 게 아니라 거의 한달 전부터 긴장이 됐다. 일에 방해가 되거나 기록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대회를 앞두고 잠을 잘 못 잤다”고 했다.
4년이 지난 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또 한번 세계 기록 경신을 합작했다. 트위터
클라우스 헤닝 슐케 씨는 물병 전달을 마치면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다음 배급대로 이동했다. 유튜브 중계화면 캡처
슐케 씨는 40km 구간에서 마지막 물병을 전달한 뒤 킵초게가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슐케 씨는 “(후반에) 속도를 좀 잃은 것 같아서 세계 기록을 세울 수 있을지는 몰랐다”고 했다. 그리고 6분 뒤 킵초게는 2시간1분09초로 4년 전보다 30초 줄인 세계기록을 세웠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