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정감사. 밤 12시를 넘길 무렵 증인으로 참석해 있던 한 대기업 사장이 불쑥 손을 들더니 “아까 끝난 사람들은 가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질문도 없이 새벽까지 앉혀놓기만 한 국감을 지켜보다 못해 ‘집에 가겠다’는 항변을 터뜨린 것이다. 이 장면을 놓고 “호통이나 면박 주기 질의를 피해 간 게 어디냐”는 말이 나왔다. 함께 증인으로 소환된 다른 대기업 대표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총수나 최고경영자(CEO)가 국감 증인으로 소환되면 기업에는 비상이 걸린다. 최소 2주 전부터 전담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로펌까지 동원해 컨설팅을 받으며 모의 국감을 치르는 곳이 많다. 표정과 손짓까지 예행연습을 반복한다.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예상 질의 내용은 물론이고 기업 정보를 어디까지 공개해야 할지 등을 놓고 회의가 반복된다. 올해는 총수들이 최종 명단에서 제외됐지만 전문경영인이 대신 출석한다고 해도 이 과정에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문제는 이런 준비가 생산적인 국회 논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CEO들의 발언을 들을 새도 없이 몰아치는 의원들의 꾸중과 윽박지르기, 망신 주기 질책이 질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10시간 넘게 국감장에 앉아있으면서 답변 시간은 1분을 넘지 못한 CEO들도 있었다. 시간 낭비를 넘어 굴욕이다. 질의 내용이 기업인들에게 때로 시장을 거스르는 간접적 압박으로 작용할 여지도 적잖다. 의원들은 올해 치킨 값을 인상한 이유를 따져 묻겠다며 치킨 프랜차이즈 기업 임원들을 소환한 상태다.
▷17대 평균 50명 선이었던 국감의 기업인 증인 수는 회기마다 늘어나 20대 국회에는 150명을 넘었다. 올해도 한 의원실에서만 기업인을 50명 넘게 신청해 “너무한다”는 뒷말이 나왔을 정도다. 정부의 국정 운영을 감사하는 자리에서 민간 기업인들로부터 들을 말이 그렇게 많을까. 환율과 주가가 날뛰고 재고가 급증하면서 기업들은 생존을 건 비상경영에 속속 돌입하고 있다. 이들이 위기 대응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국가경제를 위해 국회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