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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중현]노벨을 라이트 형제로 바꾼 순발력 발휘할 때

입력 | 2022-10-06 03:00:00

대선 때 보인 李의 높은 학습능력
급변 경제상황 맞춰 정책 재고하길



박중현 논설위원


“노벨이 9·11테러를 설계했다. 이런 황당한 소리가 국민의힘에서 나오고 있다.” 작년 10월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는 “이 (대장동 개발) 설계는 제가 한 것”이라는 과거 자신의 발언을 근거로 제기되는 의혹에 이렇게 반박했다. “노벨이 화약 발명 설계를 했다고 해서 알카에다의 9·11테러를 설계한 것이 될 수는 없다”고도 했다. 4일 뒤 그는 같은 주장을 펴면서 표현을 조금 바꿨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설계가 알카에다의 9·11테러 설계가 될 수 없다.” 주변에서 ‘9·11은 사실 비행기 충돌 테러’라는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미세한 리스크까지 빠르게 대처하는 그의 순발력과 학습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제1야당 대표다. 첫 정기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그는 기본소득 공약을 확장한 ‘기본사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소득하위 70% 노인에게 주는 월 30만 원 기초연금을 모든 노인으로 확대하고, 금액도 40만 원으로 올리는 방안도 밀어붙이고 있다. 사실상 65세 이상 노인 대상의 기본소득이다. 대통령은 되지 못했어도 169석 거대야당 대표로서 대선 공약을 현실화하는 모양새다. 윤석열 대통령도 기초연금 인상을 공약했지만 취임 후 재정부담 때문에 국민연금 개혁과 연계한 단계적 인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문제는 그가 기본소득 공약을 내놓던 1년 전과 경제환경이 크게 달라졌다는 거다. 3·9대선 직전 터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유가, 식량 가격이 폭등했다. 코로나19 이후 풀린 과잉 유동성까지 겹쳐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자 미국은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리고 있다. ‘킹 달러’로 인해 자국 화폐 가치가 떨어지자 대다수 나라들이 금리를 높여 환율, 수입물가 상승을 막으려는 ‘역(逆)환율 전쟁’에 뛰어들었다.

경제위기에 대해 급증하는 불안감이 약한 고리를 뚫고 터져 나온 게 영국 파운드화 폭락 사태다.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가 파격적 감세안을 내놓자 글로벌 금융시장은 경기를 일으켰다. 준(準)기축통화인 파운드화 가치는 사상 최저로 떨어지고, 영국 국채금리는 폭등했다.

윤석열 정부의 법인세, 소득세 감세안을 ‘초부자 감세’로 규정해 저지하겠다고 공언한 민주당은 망가진 영국 감세안에 쾌재를 불렀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감세가 아니었다. 국가채무비율 100%가 넘는 만성 적자국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5년간 73조 원 감세, 98조 원 보조금으로 돈을 풀겠다고 하자 급등한 국가부도 리스크에 금융시장이 반응한 게 사태의 본질이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영국의 국가신용등급 강등까지 예고하고 있다.

“국가채무비율 100%가 넘으면 문제가 생기나”라고 했던 이 대표는 지금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기본소득 공약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길 바란다. 한국은 영국보다 채무비율이 낮지만 증가 속도는 선진국 중 1등이고, 기축통화국도 아니다. 수출주도형 국가에서 무역수지는 계속 적자인데, 매년 수십조 원 적자국채를 찍어서라도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나눠준다는 계획을 발표한다면 ‘한국 원화 폭락 사태’를 피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아니어도 이 대표는 거대야당을 움직여 단독으로 정책을 구현할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노인 기본소득’인 기초연금 인상은 위험성이 더 크다. 국제 금융계의 눈으로 보면 한국 경제에 충격을 주는 정책을 추진하는 주체가 여당이든 야당이든 차이가 없다. 작은 리스크에도 민감한 이 대표가 특유의 순발력을 발휘해 기초연금 인상 방침을 재고하길 기대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