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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친위대원으로 13년, “인생의 가장 허무한 시간”[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입력 | 2022-10-09 12:00:00



탈북해 서울에서 살고 있는, 전 김정일 친위부대원 출신 강진 씨. 배달 트럭을 몰고 있다.

양강도의 3월은 6시 반이면 어두워진다.

강진 씨는 산에서 내려와 압록강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도로를 가로 건넜다. 이 구간은 강바닥에서부터 약 10m 높이의 석축을 쌓고 만들었기 때문에 평소에 탈북이 불가능한 곳이다. 그래서 국경경비대도 순찰만 할 뿐 고정 잠복초소를 두고 있지 않다.

강 씨는 지체할 틈도 없이 도로 옆 철조망에 올라가 바로 10m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곳을 택한 이유는 겨울 내내 도로를 청소하면서 버린 눈이 아래에 두텁게 쌓여 있기 때문에 뛰어내려도 중상은 입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눈 속에 몸이 푹 빠져들긴 했지만 돌이 가득한 바닥에 몸이 닿지 않았다. 그는 눈을 헤쳐 나와 얼음이 둥둥 떠내려가는 압록강에 뛰어들었다.

절반쯤 건넜을 때 도로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뭐라고 소리쳤고, 경비대도 달려와 총을 겨누고 “안 서면 쏜다”고 외쳤다. 그러나 뒤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총알이 날아오면 물속에 들어가려 했지만 다행히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중국 쪽에 도착하니 이곳엔 7m 높이의 수직 석축 제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은 불이 훤해 강 건너 북한 쪽에서 이쪽이 훤히 건너다보인다. 제방을 따라 뛰어 내려가는데 케이블선 하나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잡고 제방을 타고 올라가 중국 쪽 도로에 올라섰다. 아직도 강 건너에선 경비병들과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옜다! 이거나 먹어라.”

긴박한 와중에도 그는 북한에 대고 주먹질을 한 뒤 산에 올랐다. 북한에서 위험한 반역자라며 포고문까지 내걸고 인민반마다 신고하라는 강연까지 진행됐던 수배자 강진 씨가 추적을 당한지 보름 만에 탈북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김정일의 친위대이자 경호부대인 974군부대에서 13년이나 군 복무를 했던 그는 제대 후 북한을 등지고 탈출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됐다. 강을 건넌 날은 2016년 3월 17일이었다.

산에 올라가 어둠에 잠긴 북한을 건너다보니 그 땅에서 잃어버린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총구 앞에서 필사적으로 건넜던 압록강은 그가 어린 시절 늘 나와 놀던 곳이었다. 
김정일 친위부대원
강 씨는 1973년 혜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압록강에서 불과 수백m 떨어져 있었다. 여름이면 강에 나와 헤엄을 쳤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탔다. 중국 아이들도 강에서 함께 놀았는데, 놀러갈 때 북한 애들은 다리미와 명태, 숟가락을 가져가 중국 애들이 가져온 주패(플레잉 카드)나 담복(운동복)과 바꾸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혜산에는 5㎞에 경비대 초소 하나만 있을 정도로 국경경비가 허술했다. 탈북은 상상도 못할 때였다. 국경경비대원들도 강에 나와 아이들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며 놀았다.

강 씨의 인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평범하게 흘렀다. 그런데 졸업할 때 그는 중앙당 5과에 선발돼 김정일의 친위부대인 974부대에 입대하게 됐다. 한국에는 5과가 김정일의 기쁨조를 뽑는 부서로 알려졌지만, 기쁨조 뿐만 아니라 김정일의 경호부대와 별장 관리인 등도 5과에서 뽑는다. 

강 씨는 아버지가 도당 간부이긴 했지만 친위부대에 갈 정도로 출신성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5과에 뽑힌 것은 김일성의 사촌여동생과 결혼한 이용무 때문이었다. 

이용무는 김일성의 친척임을 등에 업고 1973년에 북한군 총정치국장이 된 인물이었지만, 1977년 말에 숙청돼 양강도 농근맹위원장으로 강등됐다. 총정치국장 시절 자신과 밤을 보낸 군 예술단 여성들에게 김일성 명함시계를 하사하는 등 부화방탕하게 살던 것이 적발됐다. 자신의 권력 장악에 방해되는 김일성의 친인척을 가뜩이나 곱게 보지 않았던 김정일은 마침이다 싶어 그를 멀리 양강도에 쫓아버렸다.

끈이 떨어진 그는 양강도에서 외롭게 살던 중 강 씨의 부친과 술친구가 됐다. 집에 와서 술만 마시면 “이건 수령님(김일성)이 주신 담배 물주리(파이프), 이건 수령님이 주신 금테안경, 이건 수령님이 해준 금이빨”이라며 말끝마다 자랑하던 이용무를 강 씨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용무는 술만 마시면 자기가 김정일 때문에 이 모양이 됐다고 원망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수령님이 10년 지나면 불러준다고 했다”고 손꼽아 날짜를 셌다.

과연 그는 1988년 사회안전부 총정치국장이 됐고, 이후 북한 검열위원회 위원장, 북한군 차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 승승장구하다가 올해 1월 97세로 사망했는데, 장례식장에 김정은이 직접 조문을 오기도 했다. 이용무는 술을 얻어먹은 대가로 “당신 아들은 꼭 5과에 뽑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나중에 약속을 지켰다. 당시엔 김정일의 친위대가 되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던 때였다.

1990년 강 씨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양강도 도당에 모인 5과 후보생은 모두 500명이었다. 남자는 주로 김정일 경호부대로 뽑았는데 키가 170~180㎝은 돼야 했다. 키가 160대 중반밖에 되지 않는 강 씨는 500명 중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키가 작았지만 이용무의 빽으로 최종 31명 안에 포함됐다.

기차역에서 도당 주재의 거대한 환송식이 진행됐고, 남자 31명과 여성 2명으로 구성된 양강도 5과 합격생들은 보위부의 호위를 받으며 전용 특별 차량에 앉아 평양으로 갔다. 도시락도 도당에서 마련해주었다.

2010년 대학 졸업학년 시절의 강진 씨(왼쪽). 양강도 혜산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갓 제대한 사촌동생과 찍은 사진. 사촌동생은 강 씨보다 1년 먼저 탈북해 한국에 정착했다.

427초소
평양역에 내리니 플랫폼까지 버스들이 나와 그들을 마중했다. 이후 용성구역 명호동에 있는 16과로 불리는 974부대 신병훈련소에 가서 두 달 동안 사격, 격술, 경비 등 기초교육을 받았다. 교육기간 ‘대통령 암살 미수 자작극’ ‘영국 땅에서의 격전’이라는 제목의 외국 영화도 5~6개 보여주었는데 모두 대통령 암살 사건 관련이었다.

신병훈련소에 입소한 인원은 모두 700명이었는데, 강 씨는 그중 자신이 제일 작았다고 했다. 훈련 도중 3명이 탈락했다. 탈락자들은 대중 앞에서 재판을 진행한 뒤 외진 광산 노동자로 쫓아냈다.

군관이 앞에서 “우리 974부대는 충신이 아니면 역적 두 가지 선택만 있다”며 탈락자들은 훈련을 게을리 해 역적의 길에 들어섰다고 소리쳤다. 훈련생들은 “충신은 못돼도 역적이 돼 집안까지 망하게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비슷한 시기 55과로 불리는 다른 974부대 신병훈련소에서 1400여명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55과는 평양에서 근무하는 부대원으로 전원 지방 인원으로 구성됐는데 강 씨가 있었던 16과는 지방에서 근무하는 대원을 훈련시키는 곳으로 절반 정도가 평양 출신자들이었다. 평양에서 뽑힌 대원은 평양에서 복무시키지 않는 것이 974부대의 원칙이었다. 지방 출신인 강 씨가 왜 16과에 갔는지는 본인도 알지 못했다.

김정일 친위대로 알려진 974부대 소속은 인구 통계에서 빠질 정도로 철저히 베일에 감춰져 있는데, 13년을 근무한 강 씨는 대략 인원을 알고 있었다. 장교를 포함해 모두 2만5000명 규모로 전국에서 매년 신병을 2000명 정도 뽑았다.

두 달 신병교육이 끝나고 김정일 경호책임자였던 김경옥 소장 앞에서 입대 선서를 했다. 김경옥은 김정일이 사망하기 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역임하는 등 실세로 올라섰다가 김정은 등장 이후 언론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2018년 생사는 확인됐지만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입대 선서 이후 각 훈련병의 이름과 배속 부대가 정해졌다.

“강진. 427초소”

그는 427초소가 어딘지 몰랐다. 974부대는 소속 부대 대호를 초소로 부른다. 427초소는 4월 27일에 창설된 부대라는 뜻이다.

부대가 정해지고 차량이 들어왔다. 트럭에는 병원차로 위장하기 위해 적십자가 크게 붙어있었다. 옆 친구는 426초소로 간다고 했는데 특별열차를 타고 간다고 했다. 강진은 그가 부러웠다.

강 씨가 2016년 한국에 입국하자 조사요원이 “김정일 경호부대인 974부대 출신으로는 당신이 세 번째”라고 말해주었다. 2005년경에 한 명, 2010년경에 한 명이 왔다는 것이다. 강 씨는 한국에 자기가 김정일 경호부대 출신이라고 거짓 증언을 하는 탈북민도 있지만 “몇 초소에 근무했냐”만 물어봐도 바로 거짓인지 진실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사회는 완벽하게 잊어라”
그가 탄 트럭은 몇 시간을 달려 차단 초소 3개를 통과한 뒤 멈춰 섰다. 그때는 어딘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원산 특각이었다.

들어가자 마자 신병을 모아놓고 교육이 시작됐다.

첫 번째 원칙은 “여기가 어딘지 알지도 묻지도 말라. 사회의 일은 절대 얘기하지 말라”였다. 사회에서 살던 이야기를 하면 자본주의 사상이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실제 13년 군복무 기간 강 씨는 다른 대원과 입대 전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고, 다른 대원들도 그 원칙을 잘 지켰다고 했다. 6개월은 보초 대원 옆에 보조로 서서 근무서는 훈련을 받는 ‘봉초근무’를 했다. 

원산 특각을 경호하는 974부대는 8개 중대에 2500명 정도 됐다. 일과는 간단했다. 매일 5교대로 2시간씩 보초를 섰다. 보초는 김정일이 특각에 있을 때인 ‘행사근무’ 시엔 25m, 없을 때는 50m 간격으로 섰다. 원산에선 거의 매일 행사근무 시스템이었다. 강 씨는 김정일이 평양에 있는 날보다 원산에 있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고 회상했다.

근무에 나가면 무조건 똑바로 서있어야 했는데, 벌이 쏘아도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았다. 서로가 감시를 하는 시스템이라 움직이면 생활총화시간에 비판을 받고 처벌도 했다.

보초 이외엔 정신교육 2시간, 사격훈련 2시간, 격술훈련 1시간이 매일 반복되는 일과였다. 일요일에는 보초만 서면 됐다.

강 씨는 이중 사격훈련이 제일 힘들었다고 했다. 이틀에 한 번 서서 1발, 꿇어앉아 1발, 엎으려 1발씩 실탄사격을 했는데, 100m에서 25점 이상 맞춰야 ‘우’를 받고 합격이었다. 꿇어앉아 사격이 제일 명중하기 어려웠다. 25점을 받지 못하면 20㎏ 모래배낭을 메고 4㎞를 뛰어갔다 와서 다시 사격한다. 

25점 이상 받을 때까지 이 코스가 무한 반복인데, 근무시간이 되면 2시간 보초를 서고 다시 와서 잠도 안 재우고 또 사격을 반복시킨다. 그리고 대원들 앞에서 “나는 왜 사격을 잘 하지 못했나”를 주제로 자아비판을 한다. 이런 훈련을 13년 동안 거르지 않고 진행했다. 하사로 진급하면 기관총 사격 훈련도 받는다.

먹을 것은 잘 주었다. 북한은 지위에 따라 공급이 달라진다. 974부대원은 ‘중앙당 6호 노르마’를 공급받았다. 1일 쌀 900g, 간식 100g, 돼지고기 115g, 생선 300g, 계란 3알, 기름, 설탕, 간장 30g이 6호 노르마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아침이면 밥 위에 설탕을 듬뿍 뿌려주었고, 점심엔 무조건 돼지고기 국이나 요리였는데 주로 중국산 돼지였다. 저녁에는 생선이 나왔다. 근무를 서고 오면 이름이 붙은 당과류가 놓여있었는데, 근무 중엔 절대 먹지 못하게 했다.
김정일 최측근 경호원
974부대는 오직 김정일만 알도록 교육했다. 김일성의 지시보다 김정일의 지시가 우선이었다. 1992년 974부대가 창설 10주년을 맞아 충성맹세를 올려 보냈는데 김정일이 답장을 써서 하달했다. 강 씨는 지금도 그 내용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외우고 있다.

“최고사령관의 호위 전사로 싸우다가 최고사령관의 품속에서 순직하는 충신이 되겠다고 하는데, 좋습니다. 나에게는 그와 같은 충신이 필요합니다.” 김정일은 974부대원을 ‘나의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974부대에서 5년 이상 복무한 군인 중 우수한 사람은 김정일을 최측근에서 경호하는 호위소대로 차출된다.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은의 차량을 호위하며 달렸던 키가 큰 경호원들이 호위소대 대원들이었다.

40명이 정원인 호위소대는 두 개 있는데, 20~30대로 구성된 소대와 30~50세로 구성된 소대가 있었다. 5년 동안 974부대에 근무한 대원 중 키 180㎝ 이상, 사격과 근무평점이 우수한 사람이 뽑혔다. 호위소대에 들어가면 곧바로 군관이 되며, 매년 승진해 대위까지 올라간다. 

30대 이상은 소좌부터 시작해 대좌까지 받는다. 호위소대원은 노동당 조직부 부원 증명서를 갖고 다녀 사복을 입고 있어도 검열을 무사통과한다.

974부대원의 목표는 이 호위소대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키가 작은 강 씨는 어차피 뽑히지 않을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꿈은 꾸지 않았다.

2018년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은을 호위하는 젊은 북한 경호원들. 이들은 5년 이상 974부대에 근무한 사람 중 우수한 사람들을 뽑는다고 한다. 이런 최측근 경호원 규모는 80명이다.

김정일과 젊은 여성 
원산에서 근무할 때 강 씨는 키가 작아 계속 불이익을 당했다. 대표적으로 근무 위치를 정할 때 김 씨 일가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는 늘 키가 큰 대원을 보냈고, 강 씨는 잘 안 보이는 곳에 보냈다. 

그럼에도 강 씨는 김정일을 수십m 앞에서 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젊은 여성이 김정일의 팔을 잡고 다녔다.

원산 특각은 규모가 매우 큰 편이었는데, 5세부터 17세로 보이는 아이들이 늘 30명 정도 있었다. 아이들은 여름에는 물오토바이(수상스키)를 타고 놀았고, 토요타 또는 스즈끼 로고가 붙은 전기차를 타고 경주도 했다.

강 씨가 근무 설 때도 아이들은 그 앞에서 “야, 빨리 타” “따라와”라고 소리치며 차를 몰고 다녔다. 나중에 김정은의 위대성 교육 교재엔 그가 7세에 차를 몰고, 외국의 전문가와 수상스키 경쟁을 해서 이겼다는 구절도 나왔는데, 강 씨는 그때 자기 앞에서 놀던 애들 중에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엔 그들이 누군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바다 앞에서 근무했지만, 정작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바다는 김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야한 공연에 받은 충격 
1992년 4월 974부대 창설 10주년이 되자 김정일은 “나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해주겠다”며 당시에 최고 인기였던 보천보전자악단과 왕재산경음악단 공연을 보게 했다. 이는 강 씨가 친위대에 있으면서 받았던 가장 큰 충격이었다.

근무를 서야 했기 때문에 대원들은 5개조로 나누어 공연을 보게 됐다. 원산 특각의 ‘센터’라고 불리는 건물에 대원들이 400여명 정도씩 들어갔다. 이 센터는 김정일이 연회 때 사용하는 것인데, 2조에 뽑힌 강 씨는 그날 처음 그 건물에 들어가 봤다.

공연이 시작되자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고, 팬티 차림의 여성들이 춤을 추었는데, 북한에서 그렇게 야한 공연을 처음 봤다. 한국에도 김정일 기쁨조 공연이라는 제목으로 구글에 영상이 올라와 있는데, 이는 실제로 북한에서 김정일의 지시가 있을 때마다 특정인들을 대상으로 비공개로 하는 공연이다.

먼저 들어가 본 대원들이 그 충격을 아직 못 본 대원들에게 이야기했고, 다른 대원들도 내 차례가 빨리 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2조까지 진행되고 공연이 중단됐다. 좀 있더니 “군인들이 위생규칙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전달됐다.

알고 보니 수백 명의 군인들이 김정일의 연회 공간에 들어갔더니 발 냄새가 배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들어갈 때 몸을 씻고, 발도 씻고, 덧신까지 신고 들어갔는데도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졸지에 공연을 보지 못하게 된 3~5조는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외부에 유출된 북한 무용수들의 공연. 강 씨의 경험에 따르면 이런 공연은 김정일의 허가를 받고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보여준다고 한다.

사살하면 인생 역전
974부대는 근무지에 접근하는 사람은 무조건 사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 번은 원산 특각 수리를 위해 왔던, 북한에선 소속없는 부대로 알려진 1여단 군인이 총에 맞아 죽었다. 특각 안에선 절대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했는데, 담배를 너무 피우고 싶었던 군인이 몰래 담을 넘어가 피우고 다시 넘어 오다가 사살된 것이다.

974부대원은 사살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쏴죽이면 어떤 처벌도 없는 대신, 전사영예훈장 1급을 주고, 화선입당을 시키며, 군관학교까지 보내준다.

강 씨가 복무하는 기간 5명 정도의 1여단 군인이 이렇게 사살됐다. 그래서 974부대와 1여단은 사이가 좋지 않다. 1여단은 “우리가 특각 수리 들어간 것을 다 알면서 어떻게 총을 쏠 수가 있냐”고 분노하지만, 974부대는 “장군님의 경호에는 사소한 틈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응수했다.

실제 974부대에 입대한 순간부터 대원들에게 “죽은 자만이 비밀을 지킨다”고 한 김정일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게 한다.

하지만 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원산 특각 강 건너편이 송도원국제야영소인데, 간혹 이곳에 놀려온 외국 학생들이 술을 먹고 절대 가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은 특각 쪽 다리로 오는 것이다. 이때마다 3개의 차단선 중 맨 바깥인 3선 초소에서 잡히긴 하지만, 외국 아이들이라 총을 쏘진 못하고 억류했다 풀어준다. 

구글어스로 본 강 씨가 근무했던 원산 별장. 원산 콤플렉스라고 표기돼 있는 이 별장을 2500여명의 974부대 대원들이 지키고 있다.

김정일의 별장들
974부대는 한번 부대가 정해지면 제대될 때까지 다른 곳에 갈 수 없다. 옮겨 다니면 비밀이 새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 씨는 13년 동안 4개의 특각을 옮겨 다녔다. 

1990년 이후 김정일은 아버지의 특각을 하나하나 자기 것으로 가져오기 시작했고, 특히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부터는 모든 특각을 차지했다. 그러다보니 경비 병력이 모자랐다. 원래 김일성 특각을 근무하는 경호부대는 따로 있었지만, 김정일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

애초 1982년 김정일만을 위한 부대인 974부대가 창설된 이후부터 전국 초모생 중 가장 뛰어난 후보는 먼저 974부대에서 받았다. 그리고 그 나머지 중에서 김일성 호위부대를 뽑았다. 974부대는 70%가 당원이다. 일반 부대는 10년 복무해도 노동당에 입당할지 말지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974부대는 입대 3년 뒤부터 노동당원이 된다.

김일성이 사망한 뒤 그의 경호부대 대원 중 가장 우수한 대원들이 974부대로 이동돼 왔다. 이들은 자신들은 10년 복무해야 가능한 노동당 입당이 974부대는 3년 뒤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974부대원들은 옮겨온 전직 김일성 경호부대원들을 혼혈인이라는 의미의 ‘아이노크’라고 불렀다. 아이노크들은 훈련 상태도 한심해서 974부대의 규율을 따라가기 어려워했다.

강 씨는 1992년 평남 송암 특각으로 옮겨갔다. 이곳은 김정일의 낚시터였는데, 1년에 3~4번 와서 2~3시간만 낚시를 하고 갔기 때문에 경비 병력은 70여명 정도였다. 낚시터엔 쏘가리, 백년어, 기념어, 가물치, 잉어, 붕어 못이 따로 있었다. 김정일은 쏘가리 낚시를 제일 좋아했다. 고기를 인공적으로 키우기 때문에 먹이만 주면 물 반, 고기반이 됐다.

이곳에서 6개월 정도 근무했는데 갑자기 압록강 옆의 평북 창성 특각이 규모가 커지면서 그곳으로 옮겨가 9년을 근무했다. 

이후 제대 전 2년은 황해북도 사리원 인근의 정방 특각에서 근무했다. 정방 특각은 가로세로가 5m인 화강암으로 10m 높게 쌓고 그 위에 성을 만들었다. 직접 보면 규모에 입이 벌어질 지경이라고 한다.

정방 특각에는 김정일이 1년에 3~4번 왔는데, 올 때마다 중앙당 부부장 이상급 간부들과 함께 왔다. 또 고위 간부 중에 부부가 함께 와서 거기서 눌러앉아 사는 경우도 있었다.

강 씨는 장성택 숙청이 발표된 뒤 정방 특각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런 곳에 장성택이나 김경희를 살게 하면 외부에선 절대 알 수도 없고, 허락 없이 나갈 수도 없다는 것이다.
창성 특각에서 본 김정일
창성 특각은 원산보다 더 많은 3000명의 병력이 호위를 섰다. 이곳에서 9년을 근무하면서 김정일과 김옥을 수없이 봤다. 그는 김정일의 팔짱을 끼고 늘 다니는 김옥이 정식 부인인 줄 알았다.

창성 특각도 중간에 센터 건물이 있고, 그 외 본각이 따로 있다. 김정일이 센터에서 연회를 하는 동안 김정일의 가족은 그런 행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본각에서 머물게 했다. 창성 특각은 건물이 10호동까지 있었다.

정세가 긴장되면 김정일은 가족을 데리고 무조건 창성에 왔다. 유사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주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들어오면 간부들의 고급 승용차들도 따라 들어오는데, 보통 새벽 2시까지 연회가 진행된다. 술을 마시다 김정일이 바람 쐬려 나오면 수십 명의 간부들이 따라 나온다. 

창성은 산 속에 있어 밤이면 소리가 확성기 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김정일이 담배를 피우며 “야, 아무개 노래 잘 하더라” “아무개 춤 잘 추더라”고 하는 말소리가 보초병들에게도 잘 들렸다.

새벽에 연회가 끝나도 김정일은 8~9시 사이에 일어나 마당에 나왔다. 그리고 확성기를 들고 사방에 대고 “야, 너네 아직도 자나. 빨리 나와서 운동하라”고 소리쳤다. 정작 김정일은 산책밖에 하지 않았다.

창성은 추운 지역이고 눈도 많이 온다. 눈이 오면 부대원은 무조건 나와 살얼음이지지 않게 끝이 없이 눈을 친다. 그런데 눈이 내리면 젊은 여성들이 특각 건물에서 우르르 나와 눈싸움을 하곤 했다. 

TV에서 보던 보천보, 왕재산 악단 가수도 있고, 모르는 여인들도 있었는데 모두 미모가 뛰어났다. 김정일 특각마다 5과로 뽑힌 여성 관리원들도 많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미모가 출중한 젊은 여성들이었다. 여성 관리원은 5년만 근무하면 대위 계급을 주었는데, 이들 중 김정일의 눈에 들면 관리원을 그만두고 기쁨조로 옮겨간다.

가끔 김정일도 여인들과 함께 마당에 같이 나와 눈싸움도 하며 놀기도 했는데, 이럴 때는 군인들을 철수시켰다. 그래도 “장군님, 장군님”하며 아양을 떠는 여인들의 목소리는 보초 서는 곳까지 잘 들렸다. 그런 것을 보면서도 강 씨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때는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는 행사성원들이라 생각했지, 그들이 노리개였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고 한다.

창성 특각에는 김정남도 자주 와서 말을 탔는데, 멀리에서 봐도 김정일을 닮아 그가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머지 아이들은 누가 누군지 몰랐다.

창성 특각에서 1년 넘게 머무는 외국인들도 있었다. 백인도 있고 흑인도 있었는데 강 씨는 이들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이들에겐 미모의 젊은 북한 부인이 있었는데, 이런 여성은 중앙당 5과에서 선발해 그들에게 붙여준 경우다.

창성특각의 일부 구간. 골짜기를 따라 이런 건물들이 10개 동 이상 있고, 3000명의 974부대 대원들이 주변 경비를 맡았다.

13년 만의 제대
강 씨가 974부대에 입대할 때만해도 복무 기간이 10년이었다. 그러다가 1994년에 13년으로 늘었다. 1994년 김일성이 죽자 갑자기 경비 병력이 더 많이 필요했는데, 엄격하게 골라 뽑는 974부대원을 크게 늘이기 쉽지 않자 근무기간을 더 늘였던 것이다. 3년 뒤 일반 군부대도 군복무가 3년 늘어나 13년이 됐다.

강 씨는 제대 직전에 사관장이 됐다. 중대에 한 명 있는 사관장은 일반 병사 중 가장 계급이 높아 병사들이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자리였다.

974부대는 제대할 때 100% 원하는 대학에 보내준다. 3지망까지 적게 하는데, 사관장은 무조건 우선 순위였다. 그는 가겠다고 하면 김일성대에 당연히 입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 전에 받는 사회적응 교육 시간에 생각을 바꾸었다. 974부대는 제대 직전의 군인들을 모아놓고 2달 동안 사회적응 교육이라는 것을 시켰다. 이때 강사가 나와 “사회가 지금 정말 어려우니 집이 있는 곳 대학에 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선전했다. 평양 대학에 가면 기숙사 생활을 또 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집을 떠나 13년 동안 지냈는데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는 양강도에서 제일 좋은 대학인 김정숙사범대학에 가겠다고 했다.

2003년 강 씨는 제대증을 받고 고향으로 가는 특별기차에 올랐다. 974부대에 입대하는 순간부터 사회와는 격리되기 때문에 부모님이 살아 계신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부대에선 고향에 가서 양복을 해 입으라며 양복지 한 벌 어치와 부모님께 부어드릴 술 2병, 사탕과자 1㎏를 주었고, 13년 어치의 월급도 주었다.

강 씨는 13년 만에 처음 돈을 보았다. 무려 2만3000원이나 됐다. 입대할 때 부친의 월급이 90원도 안됐던 것을 떠올리며 이거면 아버지의 20년 치 월급이니 엄청 큰 돈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일반 군부대 병사들의 월급은 5원에 불과했다. 

함께 제대돼 양강도로 가는 974입대 동기들은 20명 정도였다. 올 때는 31명이 왔는데 군관으로 빠진 사람 등을 빼니 그 정도가 남았다.

가는 도중 다른 제대군인들은 부모님께 주라는 술을 까서 마셨다. 강 씨도 13년 동안 처음 술을 마셔봤다. 역하고 못 먹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병은 남겼다.
집에 와서 받은 충격
혜산역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버스가 마중 나와 있었다. 974부대에만 해당되는 환대였다. 버스는 이들을 태우고 도당 건물로 들어갔다. 강당에 들어가니 수백 명이 이들을 기다리며 환영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각 지역 노동당 조직비서 등 간부들도 다 참가했다. 고위 간부가 나와 연설했다.

“장군님의 호위 전사로 살아온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평생을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저런 연설을 끝내고 나니 새벽 2시가 넘었다. 이후 각 제대군인들에게 비로소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13년 복무하는 동안 이사한 집도 많았지만, 강 씨의 집 주소는 입대할 때 그대로였다.

도당에선 버스로 제대군인들을 집 앞까지 태워다주었다. 그러나 강 씨의 집은 걸어서 4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는 버스를 만류했다. 그동안 보지 못한 고향을 걷고 싶었다.

고향 거리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전기가 없어 깜깜한 것도 그대로인데, 오히려 더 더러워졌다. 그런데 머리 들어 압록강 건너편을 보니 너무 밝아 깜짝 놀랐다. 그곳은 그가 입대할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천지개벽을 했다.

드디어 집 문 앞에 도착했다. 대문이 달라진 것이 눈에 띄었다. 문을 두드렸다. 한참을 두드리니 안에서 촛불 같은 것이 켜지고 “누구시오”라는 말소리가 울렸다. 아버지였다. “아직 살아 계시구나”라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

“아버지 막내 강진이 왔습니다.”

“뭐라고…” 어머니 소리도 들렸다. 부모님이 급히 나오는데, 안에서 열쇠를 3개나 열며 나왔다. 도둑이 많아 당시 혜산 집들은 3중으로 자물쇠를 채웠다.

눈앞에 나타난 아버지는 백발이 돼 있었다. 눈물이 왈칵 났다. 집 안에 들어간 그는 갖고 온 술을 붓고 절을 드렸다.

한참 회포를 푸는데, 어느 순간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네가 왔다고 쌀 구하러 갔나 보다.”

“아니, 있는 걸 갖고 먹으면 되죠.”

강 씨는 부엌에 나갔다. 밥사발 두 개가 보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풀죽이 있었다. 처음에 그는 그게 뭔지 몰랐다.

“아버지, 이게 먹는 거 맞아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억장이 무너졌다. “아니, 지금까지 이런 것을 먹고 있었단 말인가요?”

아버지는 “나라가 힘들다. 네가 이제 사회생활을 하면 알게 된다”고 중얼거렸다.

쌀 가지러 나간 어머니는 한 시간 넘게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에 어디 가서 쌀을 구한다는 말이냐 싶어 강 씨는 어머니를 마중 나가겠다고 문 밖에 나섰다. 그런데 복도에서 빈 보자기를 든 어머니가 홀로 울고 있었다.

“엄마, 이렇게 살았어요?” 모자는 또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엄마, 제가 돈 많이 갖고 왔어요. 이걸로 쌀과 고기를 사고, 내일부터 선생님들과 친구들도 불러 회포를 나눕시다.”
“남조선 쌀을 먹고 살다니.” 
어스름이 걷힌 아침 5시 반에 강 씨는 월급 배낭을 메고 엄마와 함께 시장에 나갔다. 그때 벌써 사람들이 하나 둘 나와 장사할 쌀 포대를 펴고 있었다.

쌀 가격을 보니 1㎏에 520원부터 시작됐다. 강 씨는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이란 글씨가 적혀 있는 눈에 익은 노란 쌀 마대가 보였다. 그가 근무할 때 늘 먹던 쌀 마대였는데, 가격이 580원으로 제일 비쌌다.

북한 장마당에서 팔렸던 대한민국이라고 적힌 쌀포대.


“엄마, 이 쌀은 내가 부대에서 늘 먹던 건데 왜 이리 비싸요?”

“그게 남조선 쌀인데, 제일 좋은 쌀이란다. 너는 장군님 배려로 정말 좋은 쌀을 먹고 살았구나.”

강 씨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부대에서 늘 그 쌀을 먹으면서도 대한민국이 대만인줄 알았지 남조선인줄 전혀 몰랐다.

“우리가 조국통일을 하자고 하면서 남조선 쌀을 먹고 있었단 말인가.”

부대 생활할 때 성조기가 붙은 미국 쌀도 한 달 먹은 적이 있었다. 성조기는 북한 사람들이 다 안다. 그래서 군인들에게 주는 영향이 좋지 않다고 그 이후 대한민국 쌀을 먹었던 것이다.

시장에서 돼지고기 약간과 술, 부식물을 사고 남은 돈으로 쌀을 23㎏ 살 수 있었다. 그가 13년 동안 모은 돈이 장마당에서 1시간도 안 돼 사라졌다. 고향에 와서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그는 여러 차례 충격과 허무감을 느꼈다.

쌀은 1주일도 되지 않아 다 떨어졌다. 집의 한 방에 물건이 가득 쌓여있었다. 부모님이 장사하는 물건이었다. 쌀이 떨어지자 어머니가 장사하려 나가야 한다고 했다.

“아니, 아버지 어머니, 당원이 당 규율을 어기며 장사하면 됩니까. 지금 당에서 제일 하지 말라는 게 장사인데, 그렇게 살면 어떻게 합니까.”

부모님은 한숨만 쉬더니 주저앉았다. 그렇게 부모가 장사를 하러 갈 때마다 말려 1주일 동안 못나가게 했더니 친척들이 찾아왔다.

“이봐, 진이야. 네가 지금 피우는 담배가 1갑에 500원이야. 그거면 쌀 1㎏을 살 수 있어. 네가 매일 담배를 피우면서 부모님이 돈 못 벌게 하니 아버지 엄마는 지금 너무 힘들어 해.”

“그럼 제가 담배를 끊겠어요.”

실제로 그는 그때 담배를 끊어 대학 졸업할 때까지 5년 동안 피우지 않았다. 담배 때문에 장마당에 나가는 것은 당을 배신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상과 단절돼 13년 동안 974부대에서 세뇌된 영향은 너무 컸다.

나중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장마당에 나가 돌아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게 무슨 세상이지. 인민이 이렇게 어려운데 당은 그동안 뭘 한거지?”
아내의 죽음
강 씨는 김정숙사범대학 혁명역사 학부에 입학했다. 제대돼서 오니 나이가 30세라 부모님들은 괜찮은 며느리를 찾느라 서둘렀다.

어느 날 학교 담임선생이 찾아와 어떤 여자를 원하냐고 물었다.

“제대군인 출신 당원이면 무조건 합격입니다. 다른 조건은 필요 없어요.”

그의 포부는 노동당이나 보위부 간부였다. 부인도 군인 출신 당원이면 훨씬 잘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담임선생이 얼마 있지 않아 제대군인 출신 당원이라는 한 여성을 소개시켜주었다. 얼굴도 마음도 착해 보여 선을 본 날 살겠다고 말했다.

6개월쯤 지난 2004년 그는 결혼했고 아들도 태어났다. 그런데 출산하고 3~4개월 뒤 아내가 쓰러졌다. 열이 나고 기침이 계속 터져 처음엔 기관지염인줄 알았는데, 병원에 데려 가보니 개방성 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알고 보니 아내는 군 복무 5년 만에 영양부족으로 결핵에 걸렸었다. 집에 와서 8개월 치료를 받고 입당을 하겠다고 다시 부대에 복귀했는데, 나은 줄 알았던 결핵이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재발한 것이다.

그때부터 강 씨는 대학을 다니면서 아내와 아이를 먹여 살려야 했다. 장사는 당에서 하지 말라는 부정한 행위라고 생각했던 그는 이제 사라졌다.

강 씨는 대학 내내 오전엔 학교에 가고 오후엔 나무 장사를 했다. 농촌에 가서 나무를 날라 와 혜산 장마당에서 판 것이다. 그렇게 노력해도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매일 아내에게 들어가는 약값과 링겔 주사를 놓는 비용이 쌀 2㎏ 비용이었다. 그는 직접 아내 팔에 주사바늘을 찔렀다. 그렇게 4년 넘게 매일 하다보니 눈을 감고도 핏줄을 찾아 바늘을 넣을 수 있게 됐다.

어느 날 큰맘을 먹고 나무 판 돈을 모아 염소 한 마리를 잡아 염소 엿을 만들었다. 어린 아들이 퍼먹으려 할 때마다 “엄마 먹는 거니 먹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대학에 나간 뒤 아내는 아들에게 그 엿을 계속 먹였다.

혜산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의 강진 씨. 974부대에 근무할 때는 절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 13년 동안 남긴 사진이 없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엿을 먹겠다는 아들을 욕한 것이 마음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점점 초췌하게 변해갔다. 살이 빠지고 뼈만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내를 살리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에 환멸이 느껴졌다.

2008년 그가 대학 졸업반 때 아내는 끝내 눈을 감았다. 그 역시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어졌다. 아들은 혼자 키울 수 없어 부모님 집에 보냈다.
“남조선은 얼마나 잘 사나.”
2009년 그는 마침내 대학을 졸업했다. 974부대 제대군인, 당원에 대학까지 졸업한 그는 북한에서 간부가 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 

그래서 졸업 후 보위부에 가서 권력을 쥐면 먹고 살기 좀 쉬워질 줄 알았다. 974부대원 출신은 보위부 입대 1순위이니 걱정도 없었다. 그런데 입대가 거부됐다. 알고 보니 자신이 군 복무하던 도중 5촌 고모가 탈북했다는 것이다. 친인척 중에 탈북자가 있으면 보위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중학교 혁명역사 교원으로 임명됐다. 아내도 죽고, 원하는 곳에도 가지 못했으니 이제 인생에 더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는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가정도 지키지 못했는데 무슨 충성을 한단 말인가.”

혁명역사 교원으로 있는 것도 괴로웠다. 김정일의 사생활을 13년 동안 지켜봤는데, 학생들에겐 인민을 위해 쪽잠에 주먹밥을 먹으며 매일 현지지도하면서 산다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는 ‘충성의 외화벌이’를 한다면서 산간오지로 자원해 가기도 했다. 매달 금 1.15g만 바치면 됐는데 오지로 가니 또 장사를 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2년 정도 교원을 하다가 혜산의 일반 국영기업으로 옮겨갔다. 그래도 974부대 출신이라고 세포비서로 임명됐다. 비서가 되니 자유롭게 장사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돌격대로 자원해 나갔다. 양강도 백암군에 집단배치를 한 제대군인들을 위해 집 500채를 짓는 돌격대에 나갔다. 돌격대에서 자재참모라는 직책을 맡았다. 이때부터 장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자재를 구한다며 전국을 다니면서 나르는 자재 중에 동을 수백 ㎏씩 숨겨 혜산에 갖고 왔다. 이걸 중국에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밀수를 시작했다. 중국에 아는 사람이 생기니 한국에 간 5촌 고모와도 연결됐다.

“고모 때문에 제 인생을 망쳤어요.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

고모가 미안하다며 한국돈 200만 원을 보내주었는데, 당시 중국돈으로 1만 위안 정도 됐다. 그거면 1년을 먹고 살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 그렇게 큰 돈을 만진 적이 없었다. 강 씨는 또 한번 놀랐다. “도대체 남조선은 얼마나 잘 산단 말인가.”
“위험한 역적을 체포하라!”
장사밑천까지 생기니 밀수판은 점점 커졌다. 돈도 많이 벌었다. 그가 중국을 드나드는 것을 알고 주변에서 중국에 보내달라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렇게 6명을 보내주었는데, 그들은 모두 한국에 와서 잘 살고 있다.

어느 날 한국에서 부탁이 왔다. 황해북도 사리원에 살다가 탈북해 한국에 간 엄마가 20년 전 3살 때 헤어진 아들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10번 넘게 찾으려 시도했는데 다 실패했다면서 찾으면 5만 위안을 주겠다고 했다. 엄청난 거액이었다.

그는 사리원에 사람을 보냈는데 마침 23살 된 아들을 운 좋게 찾아냈다. 그 아들은 꽃제비로 역전을 떠돌고 있었다. 그를 데리고 혜산에 데려와 엄마와 통화를 시켜주었다. 아들인지 확인하려고 아버지, 엄마, 할아버지 이름까지 물어보던 엄마는 펑펑 울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부탁대로 아들을 중국에 넘겨 보내주니 5만 위안을 보내주었다.

엄마는 연길로 날아와 아들과 함께 보름을 지낸 뒤 한국으로 오는 브로커에게 아들을 맡겼다. 그런데 그 아들이 버스를 타고 가다 일행 중 유일하게 체포됐다. 어느 역전에 도착해 담배를 피우는데, 그곳이 하필 금연구역이었다. 

단속원이 와서 말을 걸었는데, 중국어를 할 줄 모르자 체포한 것이다. 아들은 한 달 뒤 신의주 감옥으로 북송됐다. 그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를 넘겨준 강 씨의 이름을 불었다. 그때가 2016년 2월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 씨는 아들이 체포된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의 엄마가 중국을 통해 연락을 했다. 아들이 잡혔다는 것이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무조건 숨어야했다. 먼 지인의 집에 은신하고 있는데, 얼마 안 돼 신의주에서 보위원들이 직접 와서 친인척의 집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수색망은 점점 좁혀왔다. 어느 오후 그가 은신한 집에 보위원 4명이 찾아왔다. 집 밖을 나서 도망가는 순간 보위원의 눈에 띄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뛰었다. 13년 동안 모래배낭을 메고 뛴 그를 쉽게 따라오진 못했다. 하지만 상대는 4명. 20리 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마침내 인파가 번잡한 혜산 장마당 여성 화장실에 들어가 추적을 피했다. 

그를 놓친 뒤 보위부는 그가 중국으로 도주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974부대 출신인 그가 탈북하면 김정일 관련 비밀이 새어나갈 수밖에 없다. 이는 북한에선 제일 용납할 수 없는 역적 행위이다. 

이 때문에 보위부에선 시내 곳곳에 그의 사진이 붙은 포고문을 붙이고 인민반마다 그를 찾으면 신고하라고 지시도 하달했다. 북에선 더 있을 곳이 없었다. 보름 동안 추운 산을 헤매며 추적을 피하다가 결국 중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밀수를 하면서 알던 경비대나 지인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홀로 강을 넘겠다고 결심했다. 어느 저녁 압록강 인근 야산에 접근해 기회를 노리던 그는 마침내 10m 높이의 옹벽을 뛰어내렸다.

영하 수십 도의 추운 날에 압록강 얼음 물결을 헤칠 때 그는 “내가 이렇게 말로만 들었던 민족 비운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 젖은 두만강’이란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고 했다. 죽을지언정 절대로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던 강 씨의 다짐은 한 순간에 무너져 압록강 얼음물과 함께 떠내려갔다. 

압록강을 넘은 순간부터 그는 북한 당국에게 있어서 역적이 돼버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절대로 당을 배신하지 말라”고 당부하던 부모님과 형제들의 부탁을 저버린 불효자가 된 셈이었다.

탈북 직전의 강진 씨(왼쪽). 사진 속 세 사람 모두 탈북해 한국에 정착했다.

한국의 첫 인상
중국에 와서 5촌 고모를 찾으니 그가 한국행 브로커를 알려주었다. 그 선을 타고 탈북 두 달 뒤인 2016년 5월 한국에 입국했고, 10월 마침내 서울에 정착했다.

임대주택에 들어간 첫날 그는 한참을 펑펑 울었다. 저녁이 되어서 밖으로 나왔다. 여기는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제일 놀란 것은 운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북에선 먹고 살기 힘들어 저녁엔 힘이 쭉 빠져 쓰러지는데, 여긴 강아지까지 데리고 나와 뛰어다니니 참 별세계인 것 같긴 했다.

좀 더 걸음을 옮기는 이번엔 고기 굽는 냄새가 확 풍겼다. 가서 보니 야외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데, 상추에 싸서 먹는 게 이상했다. “왜 고기를 풀에 싸서 먹지” 신기하기도 하고, 배도 고파 그도 식당에 가서 고기를 주문해 똑같이 먹어보았는데 더 맛있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게 밤 12시가 넘도록 거리를 다니다가 돌아가려니 그만 내 집이 어딘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보이는 건 다 똑같아 보이는 아파트였다.

3시간을 돌아도 끝내 집을 찾지 못했다. 사회 정착의 첫 날을 밖에서 떨다가 아침에 정착 도우미에게 전화해 물어봤다. 알고 보니 집을 100m 정도 앞에 두고 온밤 헤맨 것이다.

첫 해는 안보 강사를 하면서 먹고 살았다. 2018년 아는 탈북 동생과 함께 지인의 소개로 처음 취직을 했다.

오물 소각을 하는 보일러의 재를 터는 일인데 3일 만에 쫓겨났다. 3일째 되는 날 일을 끝낸 그는 회사 부사장이 모는 포터 트럭을 타고 옷을 갈아입으러 가고 있었다. 운전석 옆 좌석에 앉은 동생이 무료해서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가 본 영상이 박근혜 탄핵 반대 시위 영상이었다.

갑자기 부사장이 차를 세우더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왜 이따위 영상을 봐. 이따위 영상이나 보고 있으니 정착을 하겠어. 당장 내려. 그리고 내일부터 나오지 마.”

“아니, 우리야 신기해서 좀 봤는데 보면 안 돼요?”

부사장은 막무가내였다. 그럼 차를 타고 가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다면서 그냥 혼자 가버렸다.

3일 동안 일한 임금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동생은 고용노동부를 찾아다니며 이악하게 투쟁해 3일치 임금을 받아냈다.

강 씨는 그때의 충격이 너무 컸다. 다시는 어디 고용돼 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혼자 할 수 있는 마트 배달을 시작했다. 2020년부터는 쿠팡 배달기사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2022년 3월 25일 ‘서해수호용사의 날’에 숭의동지회 회원들과 함께 대전현충원을 찾은 강진 씨.

숭의동지회장의 꿈
2019년 7월 그에게 제안이 왔다. 숭의동지회 회장직을 맡아주면 안 되냐는 것이었다.

숭의동지회는 1980년에 생긴, 탈북민 단체 중 역사가 가장 오랜 단체다. 회원도 8000명이나 된다.

과거엔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사무실도 유지했고, 몇 명 임원 월급도 나왔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숭의동지회 뿐만 아니라 모든 탈북단체들에 대한 지원이 끊겼다. 당장 사무실도 없는 상황이 되자, 회장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역사가 오랜 단체를 없애버릴 수도 없으니 그에게까지 제안이 온 것이다.

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그는 승낙했다. 회장이 돼 보니 참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회장직을 맡아 단체를 유지하고 있다.

탈북단체장이면 정부 보조금을 받을 사업을 골라 일을 하면서 그것만 전업할 수도 있지만, 그는 숭의동지회 회장직을 유지하면서 매일 배달을 한다. 저녁 9시에 나가 아침 9시에 들어오고, 낮 시간에는 단체의 이러저러한 일들을 처리하면 너무 힘들다. 그는 13년 군복무한 정신력으로 버틴다며 웃었다.

그가 6년 산 한국은 살기가 쉬운 세상은 아니었지만, 대신 노력하지 않으면 내 삶도 바꾸지 못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좀 더 일찍 와서 살았다면 편했을 것이란 후회도 있다.

“지금 돌아보면 김정일 친위전사라는 허황된 이름으로 살았던 13년이 제 인생에서 가장 허무한 시간이었어요. 17살부터 30살까지 젊음을 도둑맞고, 노예로 살았던 것이죠. 내 아이들 세대엔 이런 비극이 없어야 되는데, 저는 그런 날들을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기력이 남았을 때 통일되면 그는 북에 가서 할 일이 있다고 한다.

“북에 가서 김 씨 일가의 업적이란 것부터 뿌리 뽑고 싶습니다. 북한 인민을 세뇌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고, 또 그들이 80년 가까이 김 씨 일가에게 당했던 아픔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각오가 담긴 그의 눈을 보니, 북한의 어떠한 세뇌도 진실의 힘 앞에선 봄날의 눈석임처럼 힘없이 사라질 허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