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과’라니, 난 하나도 안 심심하다”, “사흘 간 연휴면 4일 쉬는 것인가요?”, “고지식은 지식이 높다는 뜻?”
10월9일은 제576돌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국경일로,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고 한글 보급·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정한 날이다.
훈민정음이라는 독창적 문자 ‘한글’이 생기면서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쓰던 불편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됐고, 그 결과 우리나라 문맹률은 현저히 낮아졌다.
◆‘심심한 사과’로 불거진 문해력 저하 논란
최근 온라인 카페의 사과문에 등장한 ‘심심한 사과’에서 ‘심심(甚深)’은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라는 뜻이지만,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뜻의 ‘심심하다’로 오인해 젊은 세대의 ‘문해력 저하’ 논란이 생겼다.
문해력 논란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3일을 뜻하는 ‘사흘’을 4일로 이해하거나 ‘오늘’을 뜻하는 ‘금일(今日)’을 ‘금요일’ 아니냐는 댓글이 온라인에서 도마 위에 올랐다.
‘성질이 외곬으로 곧아 융통성이 없다’는 ‘고지식하다’는 ‘高(높을 고)’를 써서 ‘지식이 높다’는 뜻 아니냐는 웃지못할 풀이도 있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은 지난 2014년부터 3년마다 ‘성인문해능력조사’를 실시하는데, 문해능력 수준을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읽기·쓰기·셈하기 능력 및 활용 단계에 따라 총 4단계(수준1~4)로 나눈다.
2020년 10월부터 2021년 1월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1만429명을 대상으로 한 ‘2020년 성인문해능력조사’ 결과 만 18세 이상 성인 중 초등 또는 중학교 수준의 학습이 필요한 성인은 20.2%로, 약 89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 5명 중 1명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연령별로 보면 18~29세 4.7%, 30대 4.7%, 40대 8.5%, 50대 17.2%, 60대 35.6%, 70대 58.9%, 80세 이상 77.1% 등이다.
◆온라인만의 문제가 아니다…청소년 문해능력 저하
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문해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30대 이하의 젊은 세대 비율은 4.7%로 높지 않다. 하지만 ‘중학교 이상의 의무 교육’을 받은 해당 세대의 문해능력이 ‘중학교 이하의 학습이 필요한 수준’에 머문다는 것은 짚어볼 대목이다.
더군다나 소위 ‘영상시대’에 살고 있는 학생들에게 ‘읽기’가 점차 멀어지면서 앞으로 젊은 세대의 ‘문해력’은 더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실제로 일선에서 학생들을 접하는 교사들은 학생들의 ‘문해력’에 문제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유튜브 영상이나 사진 형식의 미디어를 주로 접하다 보니 문자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는 설명이다.
경기지역에서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국어교사 노모(38)씨는 “문자에 대한 거부감이 크고, 어휘력 자체가 떨어지는 것은 요즘 학생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일이다. 학생들이 영상매체를 통해 직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이해하려고 하면서 글의 구조나 논리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고3 국어과목을 담당하는 박모(29) 교사는 “지역이나 학교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아이들이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자어를 비롯한 단어 뜻을 모르는 경우가 많고, 조금만 길어도 읽지 않거나 대충 읽는다. 반에서 1등하는 학생이 ‘가치관’이 뭔지 물어보는 것을 보고, 심각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입에서 독서가 빠지면서 독서에 대한 관심도 낮아지고 있다. 학생들이 글자를 많이 접하고, 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교육방식을 고민하고 있다”라고도 했다.
19년째 국어를 가르쳐온 중학교 교사 김모(48)씨는 과거에 비해 최근 학생들의 문해능력이 낮아졌다는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문해능력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사는 “스마트폰으로 넘기면서 필요한 것만 접하다 보니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며 “예전 같이 수동적인 방식으로 국어과목을 가르치기 어렵다. 영상, 음악, 미술 등을 활용해야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며 씁쓸해했다.
다만 “문해력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진 않는다. 대안이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독서·국어 과목 시간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업 다양화가 필요하다. 독서를 연계해 학생들이 단락 하나를 보더라도 제대로 보고,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라고 설명했다.
또 “아이들이 사고력을 높일 수 있도록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조화롭게 활용해 교육의 속도를 낮출 필요가 있다. 학생이 관심이 있는 분야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교육 방식으로 다가가서 우리 사회가 해결방안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세상이 변하듯 ‘말’도 변한다”…받아들여야 할까?
사회나 학교에서는 젊은 세대의 언어생활을 문제 삼지만, ‘문해력 논란’이 아닌 ‘언어 교체’에 따른 현상으로 보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박철우 안양대 국어문화원 원장(국어국문학과 교수)은 젊은 세대의 문해력 저하를 걱정하기보다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원장은 “최근 문해력 논란은 자주 쓰지 않고 익숙하지 않으니까 벌어지는 일이다.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걱정하는 것은 학교에서 교과서를 중심으로 정형화된 틀, 어른들이 기대하는 어휘력 등 기성세대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온라인에서 몇몇 사람의 대화가 젊은 사람을 대표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부의 사례를 두고 획일적으로 ‘젊은 세대가 문해력이 낮다’고 평가하는 것은 과한 처사”라고도 했다.
또 “안 쓰던 맥락에 들어가면 ‘문해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반대로 기성세대가 온라인 같은 데서 젊은 사람들의 문해력을 따라갈 수 있을까. 젊은 세대는 획일적이고 표준적인 면 보다 다양한 방면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중요시하다 보니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박 원장은 세대 간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면서도 젊은 세대에게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사회적 역할을 하려면 다양한 장면에 속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젊은 세대 스스로가 장면 유연성을 키워 시민으로서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보통교육, 기본교육에 대한 관심을 갖는 자세도 필요하다. 사회에서도 이에 맞는 유연한 교육을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민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문해력 논란’을 익숙해진 매체의 차이에서 오는 ‘세대 차이’라고 진단했다.
방 교수는 “시청각 매체를 주로 접하고 그것에 적응한 젊은 세대가 문자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해진 것도 사실이다. 시청각적 매체를 접하며 성장해온 세대로서의 한계를 많이 느낀다”면서도 “옳다·그르다, 좋다·나쁘다는 문제라기보다 접해온 매체에서 오는 차이다. 세대 차이의 본질이 매체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면 시청각적 매체를 통해 사유하거나 상상하는 능력은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 새 세대의 장점이 있는 것이다. ‘손실없는 진보는 없다’는 말처럼, 인터넷이나 유튜브 등은 문화적·기술적으로 진보한 것이지만, 일종의 손실을 수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문해력은 가장 기본이 되는 사회 능력이다. 이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독서 등을 통한 청소년의 문자언어 생활, 자기학습능력을 길러주는 게 중요하다. 일찍부터 문자언어에 익숙해지도록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수원=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