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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추진과 밀실행정으로 주민 갈등만 키운 ‘변전소 주민공모제’

입력 | 2022-10-11 03:00:00

광주 광산구-장성군에 후보지 선정
사전준비 소홀로 네 차례 부지 변경
감사원으로부터 주의조치 받기도



6일 전남 장성군 동화면 문화센터에서 열린 신장성변전소 건설사업 공청회. 이날 공청회에선 한전 관계자와 주민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변전소 건설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한국전력이 변전소 건설에 따른 주민 갈등을 최소화하겠다며 추진하는 주민공모제가 오히려 갈등만 키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한전은 주민공모제를 면밀한 검토 없이 추진하다 좌초되자 기존 방식으로 변전소 건설을 밀어붙였고, 결국 감사원으로부터 주의 조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 변전소 주민공모제 폐기
10일 한국전력 등에 따르면 한전은 2013년 광주·전남지역 전력 수요 증가에 대응하고 신광주변전소(용량 345kV) 과부하를 해소하기 위해 각각 345kV급 신규 변전소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신규 변전소는 전남 영광군 한빛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된 345kV(34만5000V)의 전압을 낮춰 주변 154kV(15만4000V) 변전소로 보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한전은 먼저 광주 광산구와 전남 함평군에 걸쳐 있는 빛그린산업단지에 345kV급 신규 변전소를 건설하려다 무산되자 2015년 계획을 바꿔 광산구와 전남 장성군 한 곳에 신규 변전소를 짓기로 했다. 총사업비 345억 원을 들여 2만1840m² 터에 옥외형 변전소와 송전선로를 갖출 계획이었다.

이에 한전은 광산구와 장성군에 변전소 후보지 10곳을 선정한 뒤 주민공모제로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일방적으로 변전소 부지를 결정했던 기존 방식과 달리 변전소 입지 희망 지역을 사전에 파악해 건설하면 주민 갈등이 줄어들 것이라고 홍보했다.
● 네 차례나 부지 변경
한전은 2017년 후보지별로 주민간담회를 열고 전문가 16명이 참여하는 입지확정위원회 회의를 거쳐 장성군 동화면 구룡리 47-4번지로 부지를 선정했다. 한전은 변전소 해당 마을인 구봉마을에 특별 지원사업을 벌이고 유치 인센티브로 거액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인근 덕산마을 등에도 각종 지원사업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부 주민들은 구룡리 47-4번지가 산 중턱이어서 인근 마을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피해가 최소화될 것이라 판단해 부지 선정에 동의했다.

하지만 주민공모제는 곧 난관에 부딪혔다. 구룡리 47-4번지가 환경평가 2등급 부지의 70% 이상을 차지해 변전소 건설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한전 관계자는 “장성군 등 관계기관이 변전소 건설이 가능하다고 해서 이 부지를 선정한 것”이라며 “나중에 보전 가치가 높은 땅이어서 개발제한구역 관리계획 변경이 안 돼 다른 부지를 찾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장성군은 “한전이 공식적으로 구룡리 47-4번지에 변전소 건설이 가능한지 문의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감사원이 주민들이 청구한 공익감사를 진행한 결과 장성군은 “개발제한구역 내에 전기공급 설비 설치 허가가 가능하다”고 회신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전은 주민공모제 첫 번째 부지에 변전소 건설이 어렵게 되자 이곳에서 200m가량 떨어진 아래쪽에 두 번째 부지를, 또 두 번째 부지 오른쪽 땅을 세 번째 부지로 제시했다. 하지만 주민이 반대하고 개발제한구역 관리계획 변경 또한 어려워 포기했다. 한전이 사업 타당성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탓에 주민공모제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한전 ‘사업 선정’ vs 주민 ‘원안 추진’
한전은 결국 2020년 6월 첫 번째 부지에서 1km가량 떨어진 구룡리 99-1번지를 네 번째 부지로 결정했다. 변전소 부지가 네 차례 바뀌면서 주민 간 반목과 갈등만 커졌다. 일부 주민들은 “네 차례나 변전소 부지가 변경돼 주민공모제를 다시 실시하든지, 사업을 취소하든지 하라고 하자 한전이 기존 방식으로 슬그머니 변경했다”고 주장했다.

감사원도 한전이 2년 7개월 동안 주민공모제를 취소한 것을 알리지 않아 주민 신뢰와 공모제도 취지를 훼손했다며 지난달 한전 사장에게 주의 조치를 내렸다.

한전은 6일 장성군 동화면 문화센터에서 열린 345kV 신장성변전소 건설사업 공청회에서 사업 추진 의지를 재차 밝혔다. 상당수 주민들은 주민공모제 첫 사업 부지인 구룡리 47-4에 변전소를 건설하면 갈등이 최소화될 것이라며 원안 추진을 거듭 요구했다.

한전 관계자는 “신장성변전소는 광주·전남지역의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 필요한 시설”이라며 “감사원 감사에서도 추진 과정에서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만큼 산업통상자원부에 실시계획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점수 장성변전소 건립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은 “한전이 변전소 사업 신청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부 주민에게 지원금을 지급했다”며 “변전소 건립 과정에서 하자가 많은 만큼 소송을 통해서라도 주민들의 억울함을 밝혀내겠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