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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곳곳 들어선 日‘열쇠구멍 무덤’ 수수께끼[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입력 | 2022-10-11 03:00:00

광주 광산구 월계동 고분의 모습. 봉분이 열쇠구멍 모양인 왜의 전방후원분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런 전방후원분은 호남 지역에서 지금까지 15기가 확인됐는데 5세기 말∼6세기 초 백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DB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1983년 이래 언론 지상에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생소한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일본 고훈 시대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왜 우리 언론의 주목을 받은 걸까. 봉분의 외형이 열쇠구멍처럼 생긴 왜계(倭系) 무덤이 우리나라에서 차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접한 일본 학계는 반색했고 우리 학계는 당혹했다. 임나일본부설 부활을 둘러싼 기대와 우려가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왔다.

우리 학계에선 새로 발견된 무덤이 왜의 전방후원분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름을 장고분이나 전방후원형고분으로 바꿔 부르거나 일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 40년 동안 15기의 전방후원분이 확인되었고 그 가운데 10기가 발굴되었지만 여전히 무덤 주인공을 둘러싼 열띤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전남에서 발견된 일본 규슈 스타일 석실
1983년 영남대 강인구 교수는 대학신문에 깜짝 놀랄 만한 연구 성과를 공개했다. 한반도 곳곳에 일본보다 이른 시기의 전방후원분이 분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지목한 무덤 가운데 고성 송학동 1호분이 포함됐다. 그는 1985년에는 해남 방산리 장고분, 그 이듬해에는 해남 용두리고분의 측량도를 작성한 다음 그것을 근거로 두 무덤 모두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임을 역설했다. 그의 견해는 크게 주목받았지만 발굴로 이어지기까지 많은 세월이 걸렸다.

송학동 1호분의 경우 2000년에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조사 결과 전방후원분이 아니었고 3기의 무덤이 연접해 축조되었기에 외형이 전방후원분처럼 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기의 무덤에서는 소가야, 대가야, 신라, 왜 등 여러 곳의 토기가 함께 출토되었고 1B호분으로 명명된 무덤의 석실은 전형적인 일본 규슈 스타일이었다.

신덕고분에서 출토된 연리문 유리구슬(지름 0.3∼1.2cm).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이와 달리 방산리 장고분은 2000년, 용두리고분은 2008년의 조사에서 전방후원분임이 밝혀졌다. 아쉬운 것은 정식 조사 이전에 이미 도굴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었다. 두 무덤 모두 6세기를 전후해 축조된 것임이 밝혀져 이 무덤들이 일본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되었을 것이라는 강 교수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전방후원분을 찾아 전국 각지를 누빈 그의 열정이 있었기에 호남 지역 전방후원분에 대한 조사 및 연구가 일찍부터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목관도 출토

전방후원분인 전남 함평군 예덕리 신덕고분에서 출토된 철제 말 재갈.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전방후원분의 존재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자 부작용이 뒤따랐다. 야산이라 여겼던 곳이 인공으로 쌓아올린 거대 무덤이라는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전방후원분은 도굴의 표적이 됐다.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 연구원들이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을 측량하기 위해 현지를 찾았을 때 참혹한 도굴 흔적을 목격했다. 그들은 즉시 상부에 보고했고 보고를 접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은 검찰총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수사를 요청했다. 그와 함께 국립광주박물관은 조사단을 꾸려 긴급 수습 발굴에 나섰다. 교란된 흙을 제거하고 석실 안으로 진입해 보니 큼지막한 목관 조각과 함께 도굴꾼의 삽날에 깨졌음 직한 유물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발굴이 끝났을 때쯤 한 남성이 국립중앙박물관 입구에 유물이 든 상자를 맡겨 놓고 사라졌는데, 나중에 확인하니 그 속에 유물이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철제 손칼 조각을 발굴 시 수습한 손칼 조각과 붙여 보니 딱 들어맞았다. 아마도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 오자 위기를 느낀 도굴꾼이 그리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실에서는 보고서 발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목관의 재질을 분석하였는데 무령왕 부부의 목관과 마찬가지로 일본산 금송으로 제작된 것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또한 유물 가운데 백제산 혹은 현지산이 다수를 점하지만 왜에서 들여온 것도 일부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시점에 이 고분 발굴 결과가 공개될 경우 자칫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오용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박물관장은 발굴 결과 공개를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발굴 30주년이 되던 지난해 국립광주박물관은 발굴보고서를 간행하였고 특별전시회를 열어 발굴 유물 전체를 공개하였다. 이제 더 이상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한 두려움을 품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무덤 주인은 망명한 왜인이나 왜계 관료?
지금까지 확인된 전방후원분은 고창, 영광, 담양, 광주, 함평, 영암, 해남, 나주에 분포한다. 보통 한 곳에 1기만 축조된 경우가 많고 광주 월계동이나 고창 칠암리처럼 2기가 모여 있는 것은 드문 사례이다. 또한 현지 유력자들의 묘역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 산재하는 경향이 있다. 발굴 결과로 보면 전방후원분은 5세기 말∼6세기 초에 축조되었다.

그 시기의 백제사는 매우 다이내믹했다.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왕도 한성을 잃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는 등 위기를 맞았다가 무령왕대에 이르러 다시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전방후원분이 분포하는 시기는 바로 백제가 나락에 떨어졌다가 원상을 회복하기까지의 약 반세기에 해당한다. 그 무렵의 백제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호남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전방후원분의 주인공을 백제 중앙이 현지 토착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파견한 왜계 관료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와 달리 현지 세력 중 일부가 자신들이 왜와 강한 연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전방후원분을 축조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한반도로 망명한 왜인들이 흩어져 거주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전방후원분을 축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호남 지역 전방후원분은 아직도 실체가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다. 금년 초 광주∼강진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하다가 나주 외곽에서 전방후원분이 확인됨에 따라 고속도로 노선이 변경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호남 지역 유적 가운데 전방후원분의 위상은 매우 높다. 장차 발굴과 연구를 통해 전방후원분이 어떤 맥락에서 축조되었고 또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제대로 밝혀지길 기대한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