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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아’의 파괴성[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입력 | 2022-10-12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양심’은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입니다. 양심을 속이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합니다만 세상이 늘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데도 구멍 난 양심으로 버티고 우기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구멍은 깎을수록 커진다”는 속담이 나왔을 겁니다.

신기하게도 서양에서 시작된 정신분석학에서 ‘초자아 구멍(빈틈)’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초자아는 프로이트 이론에서 이드, 자아와 함께 마음을 움직이는 세 가지 기능 중 하나입니다. 그 안에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마음에 쌓인 ‘해야만 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 ‘스스로 되거나 이루고자 하는 것’이 모여서 작동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도덕, 양심, 가치의 집합체입니다. 언뜻 다 좋은 것들만이 모여 나를 지원하는 기능만 있는 듯 보이나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내 삶의 길을 안내하며 그 길에서 나를 돕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과 행동을 판단하면서 감독하고 통제하고 비판하며 때로는 처벌합니다. 초자아 기능이 과격하게 발동하면 내 존재의 가치가 근원적으로 흔들립니다. 고통에 시달리고 우울의 늪에 빠집니다.

내 초자아가 나만 괴롭히지 않습니다. 남도 얼마든지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의 능력,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세상이 원하는 학교, 직업을 강요한다면 이 역시 부모의 초자아가 자식의 마음을 흔들며 고통을 주는 행위입니다. 부모가 평생 자신의 전지전능(全知全能)을 소망하며 살아왔다면 상황을 돌이키기 어려울 겁니다.

태어나서 초자아가 발달하는 과정을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면 ‘나누기’에서 ‘더하기’로 성숙됩니다. 미성숙한 초자아는 모든 사람, 사물을 ‘좋음’이나 ‘나쁨’으로 양분합니다. 둘을 더하기해서 좋음과 나쁨이 동일 대상에 같이 모인 전체임을 인정하게 되면 초자아 발달이 마무리된 상태입니다. 어른이 돼서도 미성숙한 초자아를 지니고 있으면 자신에게, 남들에게 알게 모르게 폐를 끼칩니다. 마음 정리가 덜 되어 있으니 스트레스를 조금 받아도 나쁜 대상으로 분류한 사람을 충동적으로 비판하고 공격합니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심판하려 합니다. 이때 사로잡힌 논리는 흑(黑) 아니면 백(白)이어서 상대와 자신 모두 회색(灰色)일 가능성은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자아의 미숙함에 현실을 억지로 맞추려고 밀어붙이다가 가끔은 유연한 태도로 바꿔서 상대를 유혹합니다. 넘어가면, 강력한 공격이 이어집니다. 아무리 객관적 사실을 내세워도 이 사람의 미성숙한 초자아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무의식에 전부 파묻혀서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이드(본능과 욕구의 덩어리)는 반사회적이고, 의식에서도 일부분 활동하는 초자아는 이드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니 당연히 친사회적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례로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도 집단의 명령을 따르려는 초자아는 얼마든지 반사회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개인 양심과 집단 초자아 사이에서 갈등이 있다면 잘 생각해 보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초자아의 비도덕성은 인류사에서,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의사들의 비윤리적 행위 등등에서 널리 밝혀진 바 있습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자아를 파괴하거나 분열시키는 초자아에 대한 집단의 명령과 최면은 극도로 경계해야 합니다.

각자가 자신의 초자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삶의 전반적인 수준이 올라갈 겁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무조건 믿지 말고 생각의 공간을 열어 차분하게 곰곰이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옳음을 주장하려고 남을 비상식적으로 몰아세운다면 사회적 비용이 증가합니다. 빈부 갈등, 성차별, 성소수자 차별, 세대 갈등도 근원을 들여다보면 과도하고 미성숙한 집단 초자아가 작동한 결과입니다. 초자아는 잠재적으로 비도덕적이고 공격적이며 파괴적입니다. 완벽한 초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누구의 초자아에도, 양심에도 빈틈이 있었고 새삼 틈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깨달음만이 자신의 초자아를 들여다볼 동기를 부여합니다. 흠결 없는 인격체라고 스스로 착각하는 순간 초자아에 장착된 폭탄(시기심, 질투심, 경쟁심, 증오심, 복수심, 수치심, 죄책감 등)의 배선이 완성됩니다. 마음속 다이너마이트가 점화되지 않으려면 나 그리고 남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불안과 고통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대화해야 초자아의 설계와 기능을 바꿀 수 있습니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덮어서 감추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내 탓이오’는 내게 가혹한 것이고, 무조건 ‘네 탓이오’는 남에게 매몰찬 것입니다. 성숙한 초자아는 그 중간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악한 행위는 이드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결과가 반드시 바람직할까요? 확신에서 저질렀다고 해도 범죄는 범죄입니다. 호소력이나 설득력으로 위장한 미성숙한 초자아에 그럴듯한 명분을 더해 누군가가 앞으로도 나쁜 짓들을 저지를 겁니다. 읽어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