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성 화백, 가나아트센터 제공
청명하고도 쌀쌀했던 11일 경북 경주시.
한국화 거장 박대성 화백(77)의 작업실은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박 화백을 “스승님”이라 부르는 이순자 씨(65)는 2007년 박 화백이 시민들을 상대로 무료 그림 수업을 진행하는 ‘우리 그림 교실’ 1기 수강생.
15년간 연을 이어온 이 씨는 “스승님께서 최근 해외 일정으로 바쁘셔서 한국에 오셨다길래 냉큼 찾아왔다”며 “그림에서 묻어나는 엄격한 정신력을 외국에서도 알아본 것 같다”고 기뻐했다.
22일 하버드대와 다트머스대 전시를 위해 또 한번 미국으로 나서는 그는 해외에서의 주목에 대해 “우리만 우리를 너무 모른다”고 했다. 국내에서 한국화를 도외시하는 데에 대한 섭섭함을 에둘러 표한 말이었다.
외국 관객들의 극찬은 한국화가 주는 낯섦 때문만은 아니다. 박 화백은 전통 수묵화를 현대미술로 재해석해왔다.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다. 일평생 ‘보이지 않는 뿌리’를 찾았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 진정성을 느낀 것이다.” 56년 화업을 이어온 화가의 자평이었다.
LACMA 전시 전경, 가나아트센터 제공
그가 말한 뿌리는 글자다. 박 화백은 화가가 되기로 한 유년시절부터 그림 공부의 기초를 글씨에서 찾았다. 제사 지방문과 병풍을 따라 그리던 그는 이후 대만과 중국에서 서예를 공부했고 상형문자의 원형을 찾아 히말라야를 다녔다.
박 화백은 여전히 매일 글씨 연습을 하고, 그 안에서 그림을 구상해낸다.
최근 떠오른 심상도 있다. 박 화백은 현재 너비 13m, 높이 5m 대작을 준비 중이다. 경주솔거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대작 ‘몽유신라도원도’(11.5×5m)보다 더 크다. 화폭에는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이 뼈대를 잡고 고구려 벽화, 반구대 암각화, 유물 20여 점이 속속들이 그려질 예정이다.
“나의 마지막 대작일 것”이라는 이 작품의 이름은 ‘코리아 환타지’. 그는 “나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짓고 싶었다. 수묵이지만 더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르면 올해 말 완성될 예정이다.
박대성, 몽유신라도원도, 가나아트센터 제공
이 작품은 첫발에 불과하다. 그는 앞으로 “세계적인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했다.
“신라의 형상을 모본 삼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나’의 것에서 ‘우리’의 것으로 더 나아가야지. 더 단순하고 시원하게. 어느 누가 봐도 ‘내 그림이다’ 할 수 있도록.”
한국적 오브제들을 없앤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열 번 손대어 그렸던 그림이라면 그 획수를 줄여 간명하면서도 폭발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원로 거장 반열에 올랐음에도 새로운 시도는 그에게 즐거운 일이다. “인생은 원래 고행”이고 “타성에 젖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5살 때 한국전쟁으로 부모와 왼쪽 팔을 잃었다.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했다. 21살 등단 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8번이나 상을 받았다. 1984년 가나아트 1호 전속작가가 됐고, 고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월급 화가로도 일했다.
그는 굴곡진 삶을 회고하며 “예술가는 운이 있어야 하고 억척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가장 큰 운은 무엇이냐 묻자 ‘팔을 잃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팔을 잃었고, 병신 소리가 듣고 싶지 않아 집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지. 불운을 잘 다루면 그 어떤 행운보다도 더 큰 운이 된다고.”
박 화백은 “고비마다 붓을 잡아보라”고 권했다. 홀로 그림에 임했지만, 붓을 벗과 스승 삼아 일생을 보낸 화가의 덧말이었다.
“붓은 연필과 다르게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잘 따라와 주지 않을 때가 있어. 필법(筆法)이란 게 존재하는 이유지. 이 시대 우리들은 붓을 잡을 수 있어야 해.”
박대성 화백, 가나아트센터 제공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