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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 기자의 죽기전 멜로디]마음이 아플 때 바르는 음악

입력 | 2022-10-13 03:00:00

1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 특설무대에서 공연한 미국 팝 싱어송라이터 라우브. 자신의 곡 ‘Sad Forever’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정신건강 관련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프라이빗커브 제공

임희윤 기자


“여러분, 제가 정신건강의 날에 공연을 하게 되다니, 이것도 기막힌 운명이네요. 오늘이 정신건강의 날인 거, 다들 아셨어요?”

10일 저녁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 특설무대.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3일 차) 공연 중반, 촉촉한 팝의 감성에 젖은 1만 명의 관객들을 향해 미국 팝 싱어송라이터 라우브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저 한글날(10월 9일) 대체 휴일에 보는 콘서트가 꿀맛이라는 생각이나 하던 차에 뒤통수 한 대 맞았다. 객석도 조금 조용해졌다. 잠시 후 무대 뒤편 스크린에 독특한 알파벳과 숫자 조합 한 줄이 띄워졌다.

‘762-CLB-LAUV’

“제가 개설한 ‘라우브 명상 클럽’ 핫라인 전화번호예요. 힘들 땐 언제든 이쪽으로 전화하세요. 제가 수년간 지독한 우울증을 앓으면서 여러 치료를 해봤지만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게 명상이었거든요. 이젠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께 뭔가를 나눠드리고 싶어서요.”

#1. ‘슬픔에 관한 노래가 많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우울했던 시기는 언제였는지요. 그때를 어떻게 극복했나요?’

2년 전 라우브와 인터뷰를 나누며 이런 질문을 던졌다. ‘Sad Forever’ ‘Modern Loneliness’ 같은 노래를 부르는 아티스트에게 꼭 묻고 싶어서다.

“2019년 1월요. 우울증과 강박장애 진단을 받았죠. 여러 치료와 명상의 도움을 받았고, 이젠 나의 (부정적인) 생각들이 날 지배하게 내버려두기보다 제가 그 생각들을 잘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라우브는 자신의 우울함을 있는 그대로 응시할 뿐 아니라 노래에 가감 없이 녹여낸다. 마음을 휘젓는 우울함을 들여다보다 핀셋으로 가만히 몇 개의 단어, 몇 개의 음표를 건져 올린 뒤 찻잎처럼 우려낸 노래. 그것이 마음에 바르는 약을 만들어낸 것 아닐까. 그 음표 모양의 알약이 자신은 물론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까지 치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봤다.

#2. “극복하지 못했다. 고통은 나이 들지 않는다.”

6년 전 미국 텍사스주에서 만난 드러머 겸 작곡가 요시키(일본 밴드 엑스저팬 리더). “당신 삶에는 고통이 많았는데 어떻게 극복했나”라고 묻자 저렇게 답했다. 유치원 시절 집 안에서 자결한 부친의 모습을 본 뒤 어린 요시키는 충격 속에 끝없이 자살 시도를 했고 모친은 자해하는 대신 북을 두드리라며 드럼 세트를 사줬다. 엑스저팬의 발라드 명곡 ‘Endless Rain’은 요시키가 부친을 생각하며 만든, 그치지 않는 비에 관한 노래다. 여전히 비 오는 날, 마음이 아픈 날이면 수많은 음악 팬이 이 곡을 재생한 뒤 지그시 눈감는다.

#3. 이열치열(以熱治熱). 열은 열로써 다스린다는 말이다. 오늘은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 이울치울(以鬱治鬱). 우울함을 우울한 노래로 다스린다. 왜 가끔 슬플 때면 슬픈 노래를 듣고 싶어질까. 그 노래를 듣다 보면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우산도 없이 소나기를 흠뻑 맞는 것 같다. 천상의 멜로디가 만든 큰 강물이 고막 안에 굽이쳐 들어오면 나의 눈물은 갑자기 왜성(矮星)처럼 졸아든다. 그 왜성을 뒤덮고 삼키며 거대한 노래의 은하수는 나의 소우주를 관통한다. 우울과 슬픔의 강에 몸 담근 나는 이상한 카타르시스에 휩싸인다.

#4. “슬프고 괴로운 밤에는 조용히 차 키를 챙겨 들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요.”

얼마 전 술자리에서 개그맨 B가 털어놨다. 늘 호탕한 웃음과 장난기 어린 유머로 좌중을 휘어잡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혼자 운전석에 앉아 음악을 틀어요. 말도 안 되는 볼륨으로 크게…. 그러곤 꺼이꺼이 목 놓아 울죠. 그러고 나면 다시 다른 사람을 웃길 수 있는 힘이 생겨요.”

#5. ‘늦은 밤 속삭임/그 목소리들은 날 잠 못 들게 해/내게 포기하라 말하지/요즘 난 삶의 뒷자리에 앉아 있고/운전대를 잡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어’(‘Sad Forever’ 중)

우리는 화려한 팝 세계의 왕좌, 그 뒤편 커튼 속 내실에 감춰둔 우울함을 오직 노래에만 녹여내는 가수들을 알고 있다. 10대 시절 성폭력 피해 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은 레이디 가가,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리는 빌리 아일리시….

어쩌면 우린 모두 번드르르한 사회인이란 왕좌 뒤편, 내실(內室)에 기괴한 눈물의 화분을 키우는 괴짜들일지도…. 반짝이는 눈물의 열매로 만든 노래에 물 주는…. 그러고 보니 ‘우린 사실 모두가 하나의 별’이라는 가사를 지닌 노래가, 정말 많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