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말을 몰아 수도 거리 나다니고, 객사는 집처럼 집은 객사처럼 여긴다.
돈 써서 술 마시며 종일 빈둥대고, 촛불 밝혀 도박하느라 날 새는 줄 모른다.
아내가 수 놓아 보낸 글은 알기 쉬워도, 기녀의 속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운 법.
(年年躍馬長安市, 客舍似家家似寄. 靑錢換酒日無何, 紅燭呼盧宵不寐. 易挑錦婦機中字, 難得玉人心下事. 男兒西北有神州, 莫滴水西橋畔淚.)
―‘목란화(木蘭花)·임추관을 비판하다(희임추·戱林推)’ 유극장(劉克莊·1187∼1269)
시인과 동향(同鄕)인 한 선비가 고향을 떠나 수도에 와서 관리가 되었지만 근무를 소홀히 하고 유흥에 빠져 날친 모양이다. 기방을 찾기도 하고 도박으로 날을 새우기도 한다. 그러니 집과 객사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흥청망청 방탕하게 지냈다. 동향이자 선배 관리로서 시인의 심사가 꽤 껄끄러웠을 것이다. 수백 년 전 위진(魏晉) 시대, 두도(竇滔)라는 자도 그대처럼 생활이 문란해서 변방에서 첩을 얻어 딴살림을 차리고 고향의 아내를 외면했지. 하나 그의 아내가 장문의 시 한 수를 비단에 수놓아 보내자 아내의 진심을 읽은 두도는 결국 아내 곁으로 돌아왔지. 누가 뭐래도 부부만이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는 법. 속내를 알 수 없는 기녀에게 마음을 뺏긴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가. 중원 수복을 염두에 두어야 할 그대가 고작 기녀 문제로 속 끓인다는 게 가당키나 한 노릇인가.
‘목란화’는 송사(宋詞)의 곡명. 원래 사는 노래 가사답게 섬세하고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성향을 띠는 게 특징이지만, 남송 시기의 사는 탐미적 취향보다는 사회 비판적 메시지가 더 강하다. 유극장, 육유(陸游) 등을 애국 사인(詞人)이라 예우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