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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의 중국 경시, ‘제국 침몰’의 단초 되다[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

입력 | 2022-10-14 03:00:00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나는 ‘대일본제국’은 중국정책의 실패로 공중분해 됐다고 본다. 러일전쟁 후 체결한 포츠머스조약으로 일본은 한국 지배를 확정지었을 뿐 아니라 만주에 교두보를 획득했다. 랴오둥반도 할양과 남만주철도 지배권이다. 애초에 러일전쟁은 한국 지배를 노린 전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남만주 전역에 대한 지배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제국주의가 난무하는 시대에, 국력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확장을 자제할 수 있을까. 아마 그랬다면 그 후 반세기 동안 벌어진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中은 자기 망상 걸린 나라’

일본은 중국을 얕잡아보면서도 내심 ‘대국’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의 개입에도 움직이지 않던 일본은 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청 콤플렉스’를 벗고 중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하는 일본 공사관 직원들을 묘사한 그림(위쪽 사진). 일본군이 1937년 12월 13일 당시 중국 수도였던 난징으로 입성하는 모습. 일본은 승리를 확신했던 중일전쟁에서 패배하며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과 중국은 참으로 기묘한 관계다. 이웃나라면서도 역사상 외교관계를 거의 맺지 않았다. 견수사(遣隋使)·견당사(遣唐使)로 간헐적으로 교류한 고대는 차치하고, 그 후 무려 천 년 동안 국교를 맺은 기간은 150년 정도밖에 안 된다. 15세기 초에서 16세기 중엽까지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명에 조공 사절단을 보내고 황제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 받은 것이 그것이다. 그 후 임진왜란 때 강화협상을 위해 몇 차례 대면했을 뿐, 도쿠가와 시대에도 사절단 교환은 전무했다. 조선이 수시로 베이징에 사절을 보내고, 일본에도 12차례 통신사를 보낸 것과는 대조적이다. 양국이 국교를 튼 건 1871년 청일수호조규 체결이다. 그러나 그 관계도 얼마 안 가 청일전쟁으로 틀어지고 말았다. 그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된 것은 1970년대 중일국교정상화 이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두 나라 정부의 교제는 그 역사가 매우 일천하다.

그래서인지 일본인의 중국 인식은 묘한 데가 있다. 도쿠가와 시대 내내 중국문물은 대량 유입되었는데, 일본인들은 그것을 숭배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중심왕조) 말고, ‘지나(支那)’라고 칭해야 한다며 자기들끼리 논전을 벌였다. 병학자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는 강희제를 거론하며 청의 무위를 찬양한 뒤, 그런 청이 서양의 무기와 전법을 익히게 되면 일본이 위험해진다고 경고했다. 아직 중국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참패했다는 소식에 중국을 멸시하기 시작했다. 멸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좋은 구실이 생긴 것이다.

일본은 한 번도 외세가 들어온 적이 없는데 중국은 걸핏하면 북쪽 오랑캐(유목민족)에게 굴복하는 나라, 일본은 만세일계의 천황만을 모시는 지조 있는 나라인데 중국은 유방(劉邦), 주원장(朱元章)처럼 틈만 나면 임금에 반역하여 역성혁명을 하는 나라라고 흉보곤 했다. 그런데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중화(中華) 운운하며 자기 망상에 걸린 나라라는 것이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나서는 더러운 민족, 게으른 사람들, 애국심 없는 국민 등의 비난이 추가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1871년에야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하며 국교를 텄다. 양국 국새와 대사의 서명이 표시된 조약문.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정책 오판이 부른 중일전쟁
그래도 메이지정부의 대(對)중국정책은 신중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서울에 청의 군대가 출동해도 일본군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아직 겁이 난 것이다. 그러나 동학농민 봉기로 다시 청의 군대가 파견되자 마침내 대규모 군대로 청군을 이겨버렸다. 오랫동안 중국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일본인들에게 이만한 쾌거가 없었다. 근대사상의 거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실로 이번 전쟁은 일대쾌사(一大快事)다. 오래 살고 보니 이런 활극을 볼 수 있구나. 나는 나라를 세우는 기초는 단지 서양의 문명에 있을 뿐이라고 오랫동안 떠들어 왔지만…도저히 생애 중에 실현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금 눈앞에 이런 엄청난 일을 보다니. 지금은 이웃의 지나와 조선도 우리 문명 중에 포섭되려고 하고 있다. 필생의 유쾌, 실로 바라지도 못한 일이다”라며 감격했다.

그래도 아직 중국의 실력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1911년 신해혁명은 “나루호도!(역시)”였다. 일본이 이루지 못한 공화국 건설을 일거에 해내는 걸 보고 일부 지식인들은 기대를 걸었고, 개중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혁명 대열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군벌이 난립하고 부패가 극에 달하는 걸 보자 중국에 대한 태도는 점점 침략적으로 변해갔다. 더 이상 중국인은 없고 ‘시나진(支那人)’과 ‘잔코로(チャンコロ)’로만 남았다.

중국인에 대한 멸시와 중국의 실력에 대한 경시는 중국정책의 오판을 불러왔다. 일본 군부가 보기에 ‘흩어진 모래알(散沙)’ 같은 중국 정도는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자작극으로 만주를 탈취하더니,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7년 6월 베이징 근교 루거우(蘆溝)다리 부근에서 훈련하던 일본군과 중국군이 우발적으로 충돌했다. 중국은 물론 일본 정부도 확전을 금지하고 서둘러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얼마 후 상하이와 화북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면서 전면 전쟁으로 번졌다. 전쟁 결과를 우려하는 히로히토에게 일본군 사령관은 ‘단기 승리’를 약속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군은 그해 12월 중화민국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며 기염을 토했다. 기분에 취했는지 난징대학살도 벌였다. 수도를 점령하고 겁을 주면 중국이 손들 줄 알았다.
中이란 ‘거대한 늪’에 빠지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일본의 도발에 단결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흩어진 모래알 같은 중국인들에게 ‘내셔널리즘’을 선물했다. 장제스는 여기에 재빨리 올라탔다. 독일의 무기와 군사지도로 단련된 중국군은 완강히 저항했다. 장제스는 정부를 양쯔강 중류의 우한(武漢)으로 옮겼다. 여기가 또 점령당하자 내지 깊숙이 충칭(重慶)으로 옮겨 항전을 계속했다. 윈스턴 처칠의 런던만 공습당한 게 아니다. 충칭도 일본 전투기 공습을 처절하게 견뎌냈다.

아무리 쥐어짜내도 일본은 중국을 전면적으로 장악할 수 없었다. 너무 넓고 너무 많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밥그릇까지 공출하고 조선인을 병사로 동원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진흙탕에 빠져 이도 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나라나 혼미할 때가 있고 약해 보일 때가 있다.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거 같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보라. 초강대국 미국, 소련도 허우적대다 간신히 빠져나왔다. 푸틴도 이 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중국이다. 1941년 일본군은 미국과 동남아시아에까지 전선을 확대했지만 중국의 반격이 두려워 중국 주둔군을 빼내지 못했다. 대일본제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늪에 빠져 익사한 것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