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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지팡이의 날’ 앞뒀는데…있으나 마나한 지하철 역사 점자

입력 | 2022-10-14 15:12:00

오염된 점자에 손으로 잘 읽히지 않아
출구 번호 알려주는 점자 없이는 나가기도 어려워
음성안내기 부재에 불편 더욱 가중




“이건 읽을 수가 없네요….”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경의·중앙선 이촌역. 시각장애인 홍서준 씨(42)가 용산 방면 1-2 승강장의 스크린도어에 설치된 점자를 만진 뒤 이렇게 말했다. 홍 씨는 “점자가 크게 오염되고 훼손됐다. 점자에 익숙하지 않은 시각장애인이라면 점자를 인식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가 지정한 ‘흰지팡이의 날’(15일)을 앞두고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와 함께 서울시내 전철 역사 내 점자표기 실태를 점검했다. 시각장애인의 사회적 보호와 안전 보장, 자립 등을 상징하는 흰지팡이는 1943년 안과 의사인 리차드 후버 박사가 시각장애인들의 보행을 위해 고안했다.

점검 결과 대부분의 승강장엔 운행 방향과 승강장 번호를 알려주는 점자가 설치돼 있었지만, 점자가 오염되거나 훼손돼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서울 용산구 이촌역 역사 내 스크린도어에 위치한 점자가 오염되고 훼손된 모습. 시각장애인 홍서준 씨(오른쪽)가 지팡이를 들고 걷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오염되고 훼손된 점자…점자 아예 없는 곳도

승강장이 야외에 있는 이촌역의 경우 점자의 오염과 훼손 상태가 심각했다. 점자와 비슷한 크기의 오염물과 먼지가 점자 주변에 가득했다. 홍 씨가 점자를 훑어 나가자 금세 손가락에 먼지가 묻어나왔다.

경의· 중앙선 효창공원앞역 일부 스크린도어는 점자가 아예 없었다. 홍 씨는 “여기는 3년 전에도 없던 곳이었는데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라고 씁쓸해했다. 철판 소재의 점자판이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곳도 있었다. 만약 시각장애인이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점자를 만지다가는 날카로운 철판에 손을 다칠 가능성도 있었다.

역사에서 외부로 나가는 출구 번호를 알려주는 점자 역시 부족했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에 따르면 역사 내 에스컬레이터 손잡이에는 출구 위치를 나타내는 점자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지하철 5호선 광화문 역사의 경우 손잡이에 ‘직진 4~7번 출구, 우측 9번 출구 방면’이라고만 적혀 있어 정확한 출구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시각장애인 오모 씨(63)는 “정확한 출구 번호를 알려주는 점자가 부족해 매번 모든 출구를 돌아다니는 게 일상”이라고 했다.

효창공원앞역 내 계단 손잡이에 설치된 점자판. 손잡이에 제대로 붙어 있지 않아 날카로운 철판이 바깥을 향해 나와 있다. 최미송 기자 cms@donga.com

● 음성 안내기 없는 역사도 100곳

점자가 없거나 훼손된 경우 시각장애인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음성유도기’이다. 음성유도기가 설치된 역사 내에서 특수 제작한 리모컨을 누르면 역사 스피커를 통해 현재 서 있는 위치가 음성으로 흘러나온다.

그러나 코레일 460개 역사 중 64개 역사, 서울교통공사 275개 역사 중 36개 역사엔 음성유도기가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신촌역, 교대역 등 유동인구가 많은 2호선은 음성유도기가 설치되지 않은 역사가 많았다.

시각장애인 이모 씨(45)는 “몇 년 전 청량리역에서 아무리 리모컨 버튼을 눌러도 음성 안내가 나오지 않았었다”며 “결국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데려다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김훈 연구원은 “우리 사회의 장애인 인권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공공건물 내 점자가 보편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법에 규정된 점자의 위치나 크기, 간격에 맞지 않는 것들이 많다”고 말했다. 코레일은 동아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내년까지 모든 역사에 음성유도기를 설치하겠다”고 밝혔고, 서울교통공사 측은 “시각장애인 연합회와 협의해 개선해 나가겠다”고 했다.


최미송기자 cm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