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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이 아닌 피로 만든 작품이 과연 좋은 작품일까요 [이진구 기자의 대화, 그 후- ‘못 다한 이야기’]

입력 | 2022-10-15 12:00:00

[대화, 그 후-‘못다 한 이야기’]
영화 범죄도시 강윤성 감독 편 2




‘범죄도시’의 강윤성 감독과 저작권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인터뷰가 나간 뒤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처음부터 감독들이 제작사와 계약을 잘 맺으면 된다는 것이죠. 정말로 영화를 잘 만들 자신이 있다면, 계약금도 충분히 받고, 다음에 발생할 흥행도 고려해 계약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정당한 보상’ 요구도 애초에 창작자들이 저작권을 제작사에 안 넘겼다면 벌어지지 않을 문제라는 것이죠. 물론 그렇습니다. 스스로 계약을 불리하게 해놓고, 나중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해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오징어게임처럼 초대박 작품을 만든 감독이 아닌 한 제작사와 대등한 계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한국영화감독조합에 따르면 국내 영화감독들이 평생 제작사와 제대로 계약을 맺고 찍는 상업영화가 평균 5편이 안 된다고 합니다. 30, 40대 감독들은 3편이 안 되고요. 평균 수치니, 유명감독이 아닌 경우에는 이보다 훨씬 적겠지요. 작품 수가 이렇게 적은 것은 결국 제작사, 투자사를 잡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만들 기회가 적은 감독들에게 애초부터 당신이 계약을 잘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말입니다. 누군들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취업이 절실한 청년들에게 회사 재무 상태, 복지, 임금, 근무 환경 등을 다 따져보고 마음에 안 차면 가지 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대부분의 감독이 추후 발생하는 수익은 고사하고, 계약금도 많이 요구하지 못하는 데는 이런 현실도 있다고 합니다. 한정된 제작비에서 감독 계약금을 올려줄 경우 다른 부문, 예를 들어 컴퓨터 그래픽이나 음악 같은 곳에 쓸 돈이 줄어든다는 것이죠. 영화를 찍을 기회도 적은 감독들이, 간신히 찍게 된 작품의 질을 떨어트리면서까지 자기 계약금을 올려 받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기사에서 저는 창작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생존권’ 또는 ‘최저생계비’라고 했습니다. 어느 산업이든 발전하려면 인프라가 튼튼해야 합니다. 창작자들이 영화 분야의 인프라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작품 활동은 물론이고, 생계조차 불투명하다면 누가 영화 산업에 뛰어들겠습니까. 강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회에서 저작권법이 개정돼 외국에서 저작권료를 받게 되면 저작권 관리 단체가 그중 일부를 적립해 창작자들을 위해 쓸 계획이라고요. 

세계의 저작권 관리단체들은 저작권료 수입액의 일정 비율을 창작자들을 위한 생활 및 의료 지원금, 복지 등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느 분야나 비슷하겠지만 창작 활동은 직업 안정성이 굉장히 떨어지기 때문에 꾸준히 일한다는 게 쉽지 않지요. 마음이 불안한데 어떻게 좋은 작품이 나오겠습니까. 적더라도 자기 작품으로 인해 꾸준히 수입이 생기거나, 혹은 저작권료 수입을 통한 기금으로 작품 활동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K 콘텐츠가 양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교가 적당한지 모르겠습니다만, 과거 한국 축구가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대패하고 나면 유소년 축구부터 육성해야 한다, 잔디 구장이 필요하다, 체계적인 선수 육성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인프라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다른 분야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유독 영화 분야는 우리 작품이 아카데미상, 에미상을 탈 때마다 K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그 뒤에 가려진 잘못된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적은 것 같습니다. 좋은 작품은 땀으로 만들어야지, 피로 만들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