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이란, 이슬람혁명후 경제난-양극화… 의문사 분노, 정권퇴진 번져[글로벌 포커스]

입력 | 2022-10-15 03:00:00

이란 ‘히잡 시위’ 확산 왜?
팔레비 왕조 땐 “히잡 착용 금지”… 테헤란, 서구화돼 ‘중동의 파리’
1979년 혁명 이후 ‘신성’ 앞세운 독재-권력세습 등 쌓인 불만 폭발
대통령은 여성인권 억압에 앞장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간 뒤 의문사한 이란의 쿠르드족 여성 마사 아미니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가 지난달 21일(현지 시간) 수도 테헤란 거리에서 열렸다. 일부 시위대가 경찰 진압에 대비해 바리케이드를 친 뒤 불을 지르고 있다. 테헤란=AP 뉴시스


《‘히잡 의문사’로 시작된 이란 시위가 한 달 가까이 이어지며 학생과 노동자, 중산층으로 번지고 있다. 시위대의 분노가 최고 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를 향하고 있어 이슬람공화국이 1979년 건국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경찰에 체포된 쿠르드족 여성 마사 아미니(22)가 지난달 16일(현지 시간) 의문사했다. 이후 한 달째 이란 전역에서는 거센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시위대는 과거 반정부 시위 때와 달리 신정일치 국가인 이란의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83), 보수 성직자 출신의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62) 등 지도부 퇴진을 정면으로 촉구하고 있다.


1920년대 당시 이란을 통치하던 팔레비 왕조는 근대화를 이유로 여성의 히잡 착용을 오히려 금했다. 이후 1979년 이슬람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테헤란은 ‘중동의 파리’로 불릴 만큼 서구화한 도시로 유명했다. 당시 어디에서든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맨다리를 드러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 43년 만에 히잡이 정권 퇴진 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시위가 특정인의 의문사에 대한 분노를 넘어 혁명 후 ‘신성(神聖)’의 이름으로 행해진 각종 독재와 억압, 만성화한 경제난과 양극화, 부와 권력을 세습해온 소수 혁명 세력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표출된 것에 가깝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이란 ‘히잡 시위’ 확산, 왜



비밀리에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2002년 알려진 후 이란은 계속된 서방의 강도 높은 제재로 20년간 사실상 세계 시장경제 체제에서 소외됐다. 정상 교역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화폐가치가 급락하고 생필품 품귀가 만성화했으며 경제 발전이 이뤄지지 못했다. 정제시설 부족, 보수 지연 등으로 세계 4위 원유 보유국에서 기름이 부족한 웃지 못할 일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낙후된 경제 및 의료체계의 한계를 만천하에 노출했다. 14일 국제 통계 사이트 월드오미터 기준 이란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와 사망자는 각각 755만 명, 14만 명을 넘어섰다.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2.2%에 달하고 수년째 10%대를 넘어선 만성적 실업난으로 서민 생활고가 극심한데도 당국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차단하고 실탄과 최루탄을 난사하며 무력으로 시위를 탄압하자 민심이 폭발한 것이다.

이제 시위대의 분노는 33년째 집권 중인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향하고 있다. 혁명을 통해 2500여 년간 유지됐던 페르시아 군주제를 무너뜨린 초대 최고지도자 호메이니는 1989년 사망 때까지 10년간 권좌에 있었다. 이를 물려받은 하메네이는 호메이니보다 3배 이상 긴 33년째 집권 중일 뿐 아니라 80대 고령임에도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 와중에 하메네이 측이 그의 젊은 시절 제자인 라이시 대통령이나 하메네이가 총애하는 차남 모즈타바(53)를 후계자로 내세우려는 속내를 심심찮게 드러내자 시위대가 더 분노하고 있다.
○ 역대 반정부 시위 중 최고 격렬

혁명 후 지금껏 이란에서는 수차례 반정부 집회가 발생했다.

1999년 당국이 진보성향 신문 ‘살람’이 기밀문서 유출, 여론 선동 등을 했다며 강제 폐간시키자 테헤란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다. 당시 곳곳의 대학생과 젊은 진보 지식인은 언론 자유를 촉구하며 동참했다.

그러나 이들의 지지가 두터웠던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 당시 대통령이 침묵을 통해 사실상 시위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면서 시위 동력이 약화됐다. ‘정부 위의 정부’로 불리는 최고 실세조직 혁명수비대와 보수 이슬람 세력은 시위대를 탄압했고 시위는 1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2009년 6월에는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당시 대통령의 재선 성공 이후 제기된 부정선거 의혹으로 반정부 시위가 발발했다. 이란은 4년 임기의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지만 후보 선정, 투표 과정 등에서부터 최고지도자 등 이슬람 보수 세력이 깊숙하게 관여해 사실상 공정 선거가 치러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아마디네자드 당시 대통령은 과거 미국 뉴욕에서 “미국이 비밀리에 9·11테러에 개입했다”는 주장을 펼 정도로 반미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보수파는 지지했지만 국내외 비판이 적지 않던 그가 개혁파 지도자 미르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자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진보 지식인과 젊은층이 반발했다. 시위대가 무사비 후보의 상징색인 녹색을 차용한 플래카드 등을 사용해 ‘녹색운동’이란 이름이 붙었다.

당시 시위대는 테헤란을 비롯한 곳곳에서 “내 표는 어디에” 구호를 외치며 부정선거를 문제 삼았다. 그러나 당국의 무력 진압을 이기진 못했다. 다음 해 2월까지 이어진 시위 기간 중 최소 100명이 숨지고 4000여 명이 구금됐다.

2019년 11월에는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당국이 전격적으로 가스 보조금 지급을 줄이겠다고 발표하고 이후 가스값이 300% 가까이 급등하자 민생고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다. 당시 대통령은 국민에게 고른 지지를 받던 개혁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었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민심이 돌아섰다. 천연가스가 풍부한 남서부 후제스탄에서 시작된 시위가 전국 곳곳으로 퍼지자 당국은 발포 등 강경 진압에 나섰다. 당시 최소 304명이 사망하고 7000여 명이 구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미니 의문사가 촉발한 올해 반정부 시위는 언론 자유, 부정선거, 경제 등 특정 의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 지도부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으로 퍼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간 반정부 시위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10대, 남성, 중산층, 에너지업계 노동자 등 사회 거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구기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과거 반정부 시위는 특수 계급 혹은 특수 지역 중심이었다면 이번에는 크고 작은 시위를 경험했던 다양한 계층이 결집했다”며 43년간 누적된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역대 반정부 시위 중 가장 격렬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진단했다.
○ 경제난 속 양극화 극심

시위대가 특히 분노하는 지점은 오랜 제재로 경제 발전이 사실상 멈춘 상황에서도 양극화는 점점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이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12년 8525.8달러(약 1193만 원)였지만 2020년에는 3분의 1 수준인 2756.7달러(약 386만 원)로 크게 줄었다. 이란의 노사관계 단체 ‘이슬람 노동위원회’에 따르면 60%의 이란인은 가계 평균 수입의 50% 이하를 버는 ‘상대적 빈곤’에 처해 있다. 또 그중 절반은 기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절대 빈곤’ 상태다.

반면 2020년 기준 100만 달러(약 14억 원) 이상의 현금 자산을 보유한 부유한 개인의 수는 한 해 전보다 21.6% 늘었다. 세계 평균(6.3%)을 3배 이상 웃돌았다. 8700만 국민 대다수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소수 부자들은 이와 무관하게 꾸준히 늘고 있다는 의미다. 현재 소득 상위 10%는 국민총소득(GNI)의 31%를 차지하고 있다. 하위 10%는 불과 2%만 갖고 있다.

특히 혁명 원로의 후손으로 이란판 최고 금수저로 꼽히는 ‘아가자데’의 행태는 서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이들은 최고급 자동차와 장신구, 음주와 향락이 난무하는 호화 파티를 즐기는 데다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연일 부를 과시하고 있다.

호메이니의 증손녀 아테페는 2018년 영국 런던에서 3800달러짜리 돌체&가바나 가방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사에드 톨루이 전 혁명수비대 장군의 아들 라술은 딸의 생일 파티를 위해 애완용 호랑이를 동원하고 캐딜락을 몰았다. 아마드 소바니 전 베네수엘라 주재 이란대사의 아들 사샤는 세계 각지에서 반라의 여자들을 대동하고 파티를 즐겼다.

이란계 미국 작가 아자데 모아베니는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부유층 거주지인 테헤란 북부 여성의 상당수는 히잡을 쓰지 않는다”며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 가방을 멘 여자들이 최고급 식당을 드나드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히잡 착용을 느슨하게 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전통복장 단속이 주 업무인 ‘도덕 경찰’에 끌려간 아미니와 달리 경제난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부유층 거주지에서는 도덕 경찰 자체가 없다고 비판했다.

양극화의 정점에 권력 세습 시도가 있다. 하메네이의 차남 모즈타바는 공식적으로는 맡은 직책이 없다. 그러나 부친이 33년간 최고지도자로 군림하는 동안 금융자산 통제권, 군 보안조직 인사권 등을 속속 손에 넣고 막후 권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가디언 등은 특히 그가 혁명수비대 산하 육군 조직 ‘바시지 민병대’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부친의 신뢰가 두터워 ‘하메네이의 문지기’로 불린다고 전했다.

바시지 민병대는 1999년 학생 시위, 2009년 녹색운동 등 주요 반정부 시위 때 시위대를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강경파 아마디네자드 전 대통령이 2005년 대선에서 첫 집권에 성공했을 때도 모즈타바가 아마디네자드를 강하게 지지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 여성 인권 억압하는 현 대통령
지난해 8월 집권한 라이시 대통령은 젊은 시절 하메네이로부터 신학을 배웠다. 공식 직책이 없고 세습 비판이 불가피한 모즈타바보다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메네이도 호메이니가 사망했을 때 대통령 자리에 있다가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라이시 대통령은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1988년 이후 검찰총장 자격으로 반체제 인사 수천 명의 숙청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테헤란의 도살자’란 별명을 얻었고 미국의 제재 명단에도 올랐다. 그는 2020년 1월 가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이 미국의 무인기 공격으로 숨지자 장례식장에서 하메네이 옆자리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암살 공격을 승인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복수도 다짐했다.

그는 대선에서 승리한 후 첫 기자회견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미국을 믿지 않는다며 서방이 먼저 제재를 풀어야 이란 또한 핵합의 복원 협상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힌 강경파다.

1일(현지 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의 한 쇼핑가를 걷고 있는 이란 여성들. 대부분 검은색 차도르로 온몸을 가리고 머리에 히잡을 썼다. 테헤란=AP뉴시스

그런 그가 민심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라이시 대통령은 집권 1년을 맞은 올 8월 여성이 히잡을 쓰지 않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면 최대 1년간 각종 권리를 박탈한다는 법령에 서명했다. 히잡 착용 단속을 위한 최신 안면인식 기술도 도입할 뜻을 밝혔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라이시 대통령은 하메네이의 ‘복심’이며 둘은 사실상 정치적 운명 공동체”라며 “경제난으로 흉흉한 분위기에 공권력에 의한 의문사까지 발생하니 민심이 폭발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슬람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71년 이란 테헤란대에서 다리가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 사진 출처 이란 외교부 발간 ‘이란 왕의 땅’ 

신변 안전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이란의 저명 언론인 또한 미 시사주간지 타임에 “당국이 시민을 체포하고 총탄을 발사할 때마다 스스로의 발에도 총을 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며 현 반정부 시위가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통치 방식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