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사라지고 싶어 떠난 곳… 여우가 나를 혼자 두지 않았다[책의 향기]

입력 | 2022-10-15 03:00:00

◇여우와 나/캐서린 레이븐 지음·노승영 옮김/448쪽·1만9800원·북하우스



저자가 미국 로키산맥 자락에 지은 오두막(왼쪽 사진)은 가장 가까운 도시가 100km 남짓 떨어졌을 정도로 외딴 지역이다. 그 역시 “혼자 지내기에 알맞은 장소는 아니었다”고 한 이곳에 우연히 야생 여우(오른쪽 사진)가 나타난다. 저자는 “적어도 내겐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다”던 여우와의 인연을통해 다시 세상과 관계를 회복해 나갈 용기를 배운다. 북하우스 제공


매일 오후 4시 15분이면 여우가 온다.

미국 서부 로키산맥의 한 자락, 외딴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푸른 오두막이 있다. 생물학자인 저자가 대학 시간강사 계약이 끝난 뒤 지은 집. 그런데 어느 날부터 여우가 찾아왔다. 그것도 12일 내내. 하루는 마음먹고 가만히 앉아 봤다. 그러자 여우는 2m 정도 떨어진 채 가만히 눈을 맞춘다.

‘여우와 나’는 독특한 책이다. 과학서라기보단 2005년부터 2, 3년 동안 여우와의 인연을 그린 회고록에 가깝다. 미 옐로스톤국립공원을 비롯해 여러 국립공원에서 레인저 등으로 활동했던 저자는 당시 학계에서 그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뒤 ‘PEN 에드워드 윌슨 과학저술상’ ‘노틸러스 북어워드 금메달’을 휩쓸었다.

저자 캐서린 레이븐. 북하우스 제공

자꾸만 찾아오는 여우. 이 기이한 우정을 이어가려 저자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의 소설 ‘어린 왕자’를 읽어준다.

“어린 왕자는 생텍스에게 양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단다. 생텍스가 부탁을 들어주는 이유는… 음, 그건 정 때문인 것 같아, 여우야.”

몇 마디 건넨 다음엔 15초의 침묵.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는 시간은 여우와 저자만의 패턴이었다. ‘어린 왕자’에서 왕자와 여우가 서로를 길들여 간 것처럼, 저자와 여우도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 간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 시작은 기억도 불분명할 만큼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저자는 여우와 관계를 맺은 ‘처음’을 떠올리려 애써봤지만 자꾸만 헷갈렸다. 4월이라고 썼다가 선을 긋고, 3월이라 고쳤다가 지우고…. “우리 사이에 ‘유레카’의 순간은 없었다.”

저자도 어이가 없었다. 그 역시 “과학적 방법이야말로 앎의 토대이며 야생 여우에겐 인격이 없다”고 배운 생물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5일째 되던 날(여우의 시계로는 약 6개월) 저자는 여우를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항상 만나던 오후 4시 15분 그 자리에 나가지 않고 외출해 버렸다. 여우 생각이 나지 않을 만한 일거리를 만들어서. 하지만 자꾸만 신경 쓰이고 떠오르고. 결국 저자는 다시 여우와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여우를 만나기 전 그의 소원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너를 원한 적이 없다”던 아버지. 열여섯에 집에서 도망쳤다. 평생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부유하듯 살아왔던 인생. “관계 맺는 일에 늘 젬병”이었던 저자에게 손을 내민 게 야생동물이었단 점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짐작했겠지만, 어느 순간 여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산불이 한 번 난 뒤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당연히 그리웠겠지만, 저자는 배운 게 있다. 이제 그는 사라지려고 애쓰는 짓을 관두기로 했다. 누군가를 곁에 두고 싶어 했던 “우리 여우”처럼.

‘여우와 나’는 정의하기 무척 어렵다. 머리보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과학책은 처음 봤다. 특히 시적인 묘사와 섬세한 문체는 교양과학서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저자가 여우에게 읽어준 ‘어린 왕자’의 또 다른 버전이랄까. 읽는 내내 현실이라 믿기 힘든 동화 속 세상을 엿본 기분이 든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