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보호종료 돼 홀로서기 나서는 ‘자립준비청년들’ 홀로서기 청년들의 소망 강아지 키우며 인생 180도 달라져 기아대책 ‘바리스타 인턴십’
11일 오전 ‘나로서기 바리스타 인턴십’에 참여한 자립준비청년들이 서울 금천구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 바리스타를 꿈꾸는 자립준비청년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정규직 취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인턴십 기회를 얻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보육원 등 아동양육시설이나 위탁가정의 보호를 받다 자립에 나서는 만 18∼24세의 청년을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청년)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보호 기간 동안 진로를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한 데다, 사회에 뛰어든 후에도 의지하거나 상담할 곳이 마땅히 없어 홀로서기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보호 종료 이후 인턴십 프로그램에 지원해 새 진로를 개척 중인 자립준비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조금 더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해봐.”
아동보호시설에서 자란 강지환(가명·23) 씨는 2018년 시설을 나오던 당시의 자신을 만난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강 씨는 이후 4년 동안 진로를 여러 차례 바꿨다. 고교 졸업 직후엔 ‘아동보호시설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전문대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졸업이 다가오자 ‘아이들에게 너무 감정이 이입돼 힘들 것 같다’는 걱정이 커졌다. 결국 사회복지사의 길을 포기하고 공장과 고객센터, 비영리단체, 병원 등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고 한다.
그런 강 씨에게 최근 새 꿈이 생겼다. ‘희망친구 기아대책’(기아대책)이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을 대상으로 마련한 인턴십을 통해 커피 매장에서 일하면서부터다. 강 씨는 1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열심히 배우고 경험을 쌓은 뒤 언젠가 내 카페를 열고 싶다”고 했다.
○ “첫 꿈 잃었지만 새 꿈 찾았어요”
자립준비청년은 보육원을 비롯한 아동양육시설이나 위탁가정 등에서 보호를 받다가 만 18세부터 24세 사이에 자립에 나서는 청년들을 말한다. 여기에는 친인척 가정에 위탁돼 성장한 아동도 포함된다.이들 청년은 보호 종료와 함께 홀로 서야 한다는 부담 탓에 진로를 진지하게 탐색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의지할 곳 없던 자립준비청년들이 연달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가슴 아픈 뉴스도 있었다.
기아대책은 자립준비청년들이 교육을 받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해 경제적으로 자립하도록 만들기 위해 올봄부터 기업 연계 프로그램 ‘나로서기 바리스타 인턴십’을 시작했다. 이랜드, 커피베이, 폴바셋과 협력해 바리스타를 꿈꾸는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정규직 취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인턴십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홀로서기를 꿈꾸는 자립준비청년들을 만나봤다
박서현 씨(21)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하고 11일부터 서울 금천구 ‘더 카페’로 출근하고 있다.
“커피만 내린다고 바리스타가 아니더라고요. 쉽게 자격증을 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커피가 꼭 양파 같았어요.”
열아홉 살이던 2년 전 박 씨에게 큰 고비가 찾아왔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박 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태권도 겨루기 선수로 경기에 나가며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2020년 갑작스레 부상이 찾아왔다. “경기하다가 다쳤는데, 처음엔 별로 아프지 않았어요. 한데 마저 뛰고 나니 갑자기 무릎이 너무 아팠어요. 알고 보니 인대가 완전히 끊어졌더라고요.”
선수 생명이 사실상 끝나자 박 씨는 다니던 대학 태권도학과를 자퇴했다. 오랜 꿈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비슷한 시기에 자립지원전담기관의 지원도 공식 종료됐다. 박 씨는 “진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고 돌이켰다.
이후 2년간 박 씨의 삶을 지탱한 건 ‘디저트’였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해 생계를 위해 시작한 디저트 카페 아르바이트가 적성에 맞았다. 그러다 올봄 공고를 보고 ‘나로서기 인턴십’에 지원했다. 박 씨는 “인턴십을 성실하게 마치고 취업한 뒤 기회가 되면 나만의 독창적인 식음료 매장을 내겠다는 목표가 생겼다”며 웃었다.
○ “방황하는 청년 쉼터 차릴 것”
바리스타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한 자립준비청년 유환준 씨(왼쪽)와 박서현 씨.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그런데 지난해 공사장 일용직으로 근무하던 중 파이프를 옮기다 발을 헛디뎌 허리를 다쳤다. 일을 못 하게 되면서 생활고와 우울증이 찾아왔다. ‘나는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한다. 간신히 몸을 추슬러 유통업체에서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자립준비청년들이 모인 오픈채팅방에서 인턴십 공고를 보고 용기를 냈다.
11일 첫 출근을 마친 유 씨는 “처음 듣는 용어가 많아 어려울 때도 있지만 새로운 걸 배우는 재미가 훨씬 크다. 오늘보다 내일이 기대된다”며 웃었다.
○ “10여 년 고생한 끝에 자리 잡아”
보호 종료 후 10여 년 동안 여러 어려움을 겪다가 자리 잡기에 성공한 청년도 있다. 2009년 보육원을 퇴소해 올해로 자립 13년 차를 맞은 반려견 훈련사 김태우 씨(31)다.김 씨는 보육원 퇴소 당시 자립지원금을 맡아준다는 어머니에게 전액을 맡겼지만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배신감을 느낄 새도 없이 힘든 자립생활이 시작됐다. 김 씨는 찜질방과 공중화장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텔레마케팅, 술집 아르바이트, 휴대전화 판매 등을 했다. 그래도 생활비가 부족해 빌려 쓴 700만 원이 이자를 포함해 수천만 원의 빚으로 불어났다. 김 씨는 이를 갚기 위해 숙식이 제공되는 경기 오산시 공장에서 5년여 동안 일했다.
꿈 같은 건 생각할 겨를 없이 닥치는 대로 일하던 김 씨의 삶을 바꾼 것은 강아지였다. 4년 전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한 김 씨는 유기견을 보며 ‘마치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버려진 강아지들이 보육원 시절의 저처럼 느껴졌어요. 버려졌다는 동질감 때문에 교육으로 행동을 교정하는 반려견 훈련사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요즘 김 씨는 반려견 훈련 및 훈련사 후배 교육을 하느라 쉬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낸다.
김 씨는 올 8월 광주에서 자립준비청년들이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을 두고 “나도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이 없을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했다. 김 씨는 “보육원에 있을 때 형들한테 너무 맞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뉴스를 보고 그때의 불안감을 떠올렸다”고 했다.
김 씨는 “사정을 아는 만큼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을 것 같다”며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좋은 선배가 되고 싶다는 희망도 밝혔다. “상황이 어떻든 바르게 열심히 살았으면 해요. 그러다 보면 분명히 빛이 보여요. 좋은 날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부디 그때까지 견디며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립준비청년들, 생계유지 고민에 진로탐구 꿈 못꿔
보호종료 시점 전후 진로선택 폭 좁아
“돈 벌려고 대학 진학 안해” 52%
뷰티-미용-애완 직업 고려가 20%
진학 대신 구직 택하는 경우 많아
“자립할때까지 탐색 기회 주고, 멘토링 시스템 확대할 필요 있어”
자립준비청년들은 보호 종료와 함께 진학 대신 구직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0년 진행한 ‘보호종료아동 자립실태 및 욕구조사’에 따르면 자립준비청년의 학력은 조사 대상 3104명 가운데 고졸이 1019명(32.8%)으로 가장 많았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이유 중에는 ‘취업을 빨리해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다’가 52.1%(531명)로 절반이 넘었다.
조기 취업이 목표다 보니 진출하는 직종도 또래 청년과는 사뭇 다르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2020년 서울시 아동복지협회와 진행한 ‘보호종료 20대의 삶의 행복과 가치관 연구’에 따르면 20대 자립준비청년들이 진로를 고려해본 직업 분야에선 ‘뷰티·미용·애완’이 20.3%를 차지해 가장 많았다. 또래 청년들이 공무원(25.3%)을 가장 많이 고려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자립준비청년을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 ‘브라더스키퍼’의 김성민 대표(37)는 “믿고 기다리며 지지해줄 가족이 없다 보니 한 번 실패하면 회복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며 “최근 민간에서 진행되는 인턴십 등은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면서 진로 탐색 기회까지 제공해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이 자립준비청년의 진로 탐색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자립준비청년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원하는 진로를 찾도록 지속적으로 도와야 의미 있는 취업 지원이 될 수 있다”며 “청년들이 자립할 때까지 탐색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은경 호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자립 프로그램이나 멘토 지원 등을 통해 청년들이 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지 기반을 마련해주는 게 중요하다”며 “다양한 진로 분야로 멘토링 시스템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유채연 기자 ycy@donga.com
배지현 인턴 기자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