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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박상준]진화하는 기업, 퇴화하는 정치

입력 | 2022-10-15 03:00:00

韓日기업, 시장경쟁 속 성장 거듭
정치는 상대방 비방 수준 뒷걸음질
정치 환경이 기업 발목 잡아선 안 돼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안식년이 끝나고 일본에 돌아가면 전기차를 몰아 볼까 하고 도요타나 혼다 등 일본 자동차 브랜드의 홈페이지를 둘러보았는데 사고 싶은 차가 없다. 성능은 둘째 치고 디자인이 이게 뭔가 싶어 일본에서 현대차를 사야 하나 고민이 된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변화다.

30년 전 미국에서 유학할 때, 혼다에서 나온 시빅이라는 소형차를 샀다. 현대 쏘나타보다 차체도 배기량도 작은 차가 쏘나타보다 비쌌는데도 중고로 되팔 때의 가치를 생각해서 시빅을 선택했다. 그해 겨울 혹독한 한파에 쏘나타는 시동이 걸리지 않아 차주들이 애를 먹었는데, 시빅은 멀쩡했다. 30년이 흐르고, 이제는 전기차를 살 거면 혼다보다 현대를 사고 싶다. 삼성이나 LG도 그렇지만, 가혹한 시장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부단한 노력 끝에 현대차는 놀랍게 진화했다. 그리고 진화를 거듭하며 살아남은 기업 덕에 이제 한국은 선진국이 되었다.

일본 기업들도 진화를 멈춘 건 아니다. 최근 일본 자동차 브랜드들은 우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도요타와 혼다는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와 함께 달 표면 탐사차를 개발 중이다. 지구가 아니라 달에서 달리는 유인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의 진화 역시 늘 나를 놀라게 한다.

그런데 기업은 눈부시게 진화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에서 정치는 왜 오히려 퇴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한국에서는 최근 김정숙 여사와 김건희 여사의 해외 순방을 둘러싸고 여야가 시끄럽다. 동행인, 의복, 보석 등이 문제라고 한다. 이게 정말 그렇게 큰 문제인지, 문제라면 애당초 왜 그랬는지, 문제라 해도 이렇게 시끄럽게 싸울 일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을, 단지 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요직에 앉히는 일도, 야당일 때는 그렇게 시끄럽게 야단을 치던 사람들이 여당이 되면 그게 왜 문제냐는 듯 태도를 바꾼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이런 폐단은 사라지거나 고쳐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권에서 너희도 그랬다며, 점점 더 뻔뻔해지는 것 같다. 기업은 눈부시게 진화하는 나라에서 정치는 왜 늘 이 모양인지 그것이 늘 궁금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한 언론인에게 들은 말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한국 유권자들은 프로 스포츠 팀을 응원하듯이 정치인을 응원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팀의 승리보다는 내가 증오하는 팀의 패배를 보는 것이 응원의 목적이라는 것이 그 언론인 주장의 요지였다.

그리고 정치는 내수 시장에서만 수요가 있는 서비스이고 대외 거래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정치인을 수출하거나 수입할 수 없다. 한국 정치인은 한국 유권자의 선택을 받으면 되고, 한국 유권자는 한국 정치인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국내 시장보다 해외 시장이 더 중요하고 국내뿐 아니라 해외 도처에 강력한 경쟁자가 도사리고 있는 삼성이나 LG와는 처한 환경이 완전히 다르다.

한국 정치는 삼성과 LG가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제품 개발에 힘쓰기보다는 타사 제품을 비방하는 데 주력하는 가상의 시장에 비유할 수 있다. 이 기괴한 시장에서 삼성과 LG에 아주 강력한 팬덤이 있는데, 삼성 팬은 LG가 망하는 것을, LG 팬은 삼성이 망하는 것을 보는 것이 팬덤의 존재 이유다. 삼성과 LG는 더 나은 제품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 타사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서 내 팬덤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판매 전략이기 때문이다. 팬들은 상대 기업을 부숴버리기 위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이 응원하는 기업의 제품을 산다. 삼성이나 LG보다 훨씬 좋은 제품을 개발한 중소기업이 있다고 해도 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중소기업 제품을 샀다가 내가 지지하던 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떨어지면 내가 미워하는 기업의 점유율이 50%를 넘게 된다는 공포 때문에 소비자들은 중소기업의 제품을 칭찬은 할망정 구매까지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정치가 퇴화한 것이 아니라 유권자가 퇴화한 것이다. 그러니 더 나은 정치를 바란다면 더 나은 유권자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 같은 환경에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다만, 미국이 아르테미스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거기에 참여한 일본이 달 표면 탐사차를 개발하는 지금, 퇴화한 정치 환경이 세계로 뻗어가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