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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20km, 주말엔 70km는 달려야…‘인생 3막’ 아내와 여행하며 질주”[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입력 | 2022-10-15 14:00:00


이동윤 원장이 서울 서초구 잠원동 공원에서 질주하고 있다. 그는 부산 동래고 1학년부터 ‘삶의 돌파구’로 달리기 시작해 이젠 매일 20km, 주말엔 70km 완주를 목표로 달리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병원 건물이 재건축에 들어간다고 해서 10월 말로 폐업을 하기로 했어요. 다시 준비하고 재 개업하려면 시간도 많이 필요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그동안 일하느라 가정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는데 이제 집사람하고 국내는 물론 세계를 여행하면서 인생을 즐길 생각입니다. 먼저 전국의 사찰,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달릴 생각입니다.”

올해로 만 70세인 이동윤 이동윤외과의원 원장은 부산 동래고 1학년 때부터 달리기 시작해 50년 넘게 질주를 멈추지 않고 있다. 새벽에 서울 서초구 잠원동 병원으로 출근할 때, 저녁 때 퇴근할 때 한강변을 달린다. 달리기는 공부에 찌든 학창시절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의 돌파구였고, 의사로 살면서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젠 지난 삶을 함께 돌아보는 좋은 ‘동반자’다.

대학시절 불교학생회 회장이었던 이 원장은 아내와 국내 사찰과 역사 유적지를 돌아볼 계획이다. 그는 “그 사찰이 왜 그 자리에 들어섰고, 어떤 분의 비석이 왜 그곳에 세워졌는지를 보면 옛 사람들의 삶이 보일 것이고 내 삶도 반추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지역을 아내는 걷고 난 달리면서 자세히 돌아볼 것”이라고 했다. 이 원장에게 달리기는 삶 그 자체였다.

“인문계고등학교의 특성이 다 그렇듯 새벽에 나가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오는 너무 재미없는 삶이었죠. 나만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고민을 했는데 운동이었고 선택은 달리기였어요. 우리 시대 때는 할 수 있는 운동이 제한 돼 있었어요. 기껏해야 달리고 자전거 타고 등산하는 것이었죠.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으론 달리기가 최고였어요.”

매일 새벽 일어나 집 뒷동산을 뛰어 오르내렸다. 나중에는 토끼뜀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고 나만의 도전이었기에 힘들어도 참을 수 있었다. 힘들면 걸어가면 됐다. 제약이 없었다. 나만 누리는 자유였다. 운동하고 아침 먹은 뒤 학교로 갔다. 아주 즐거웠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이동윤 원장이 서울 서초구 잠원동 공원에서 달리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의과대학에 들어가서도 틈나는 대로 달렸다. 단기간에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데는 달리기가 최고였다. 의대를 졸업 한 뒤에도 달리기는 생활의 시작이었다. 바쁜 생활 속에서 아침 달리기는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행복이었다. 1990년 대 중반 동아마라톤을 시작으로 마라톤대회에서 일반인에게도 참가 기회를 주자 1997년 42.195km 풀코스에 도전했다.

“친구가 ‘마라톤 대회에 한번 나가보자’고 해서 춘천마라톤에 출전했죠. 마라톤은 ‘신세계’였습니다. 풀코스를 한 번도 달려보지 않아 ‘마의 30km’ 이후엔 걷다 뛰다시피 해 3시간40분55초에 완주했죠. 풀코스 한 번 완주에 ‘해냈다’는 만족감과 희열에 몇 개월은 취해 있었죠. 그래서 계속 출전했어요. 달리기는 제가 내적으로 더욱 강인해질 수 있게 해준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달리기를 통해 내 인생과 성공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 원장은 그냥 달리지 않았다. 남을 위해 달렸다. 2000년 달리는의사들이란 동호회를 만들었다. 그는 “달리면서 생기는 안전사고가 많았다. 그래서 의사들이 함께 달리면서 아픈 사람이 있으면 보살피는 레이스 패트롤(Race Patrol)을 2001년 동아마라톤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달리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무턱대고 달리다 사망하는 사고가 계고 일어났다. 그래서 달림이들 교육을 시키기로 했다. 분기에 한번씩 무료 워크숍을 했다. 당시 인터넷이 뜰 때라 서울마라톤클럽 게시판 등에 ‘안전하게 달리는 법’ ‘부상 예방법’ ‘마라톤 에티켓’ 등을 계속 올렸다. 현재 ‘달리는의사들’ 홈페이지에도 즐겁고 건강하게 달리는 법을 계속 올리고 있다.

이동윤 원장이 레이스패트롤로 달리고 있는 장면. 이동윤 원장 제공.

“달리는 사람 스스로가 어떤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알고만 있어도 무리를 안 하게 되죠. 본인이 조금만 신경 쓰면 되는 데…. 마스터스마라톤 초창기에는 사망 사고가 잦았습니다. 참 안타까웠죠.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2002년부터는 소아암환우돕기 마라톤대회를 시작했다.

“1998년 국제통화금융(IMF) 구제 금융위기가 터졌죠. 맞벌이 둘 중 하나는 회사에서 나가야 하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어요. 문제는 소아암 환자의 부모가 젊다는 것입니다. 경제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애가 아픈데 일자리까지 잃으면 가정이 제대로 유지될 수가 없죠. 이혼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런데 소아암환자는 회복률이 70~80%됩니다. 거의 다 낫는다고 보면 되죠. 환자가 완치 됐을 때 가정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이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죠.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고 마라톤대회를 통해 소액기부를 받아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 도와줄 수는 없었다.
“젊은 사람들의 특징이 뭐든 쉽게 시작하고 쉽게 포기합니다. 아무리 큰 것이라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우리가 보고 있고 관심이 있다는 것만 보여줘도 이혼하려다 참고 가정을 유지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런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시작했어요. 효과도 좋았습니다.”

매년 5월 둘째 주 일요일에 대회를 개최했다. 중간에 2년을 쉬었다. 모든 대회 운영비는 협찬을 받고 참가비는 환자를 돕는데 썼는데 경제 상황이 나빠지자 협찬을 받을 수 없었다. 주위에서 ‘왜 안 하느냐’는 성화와 ‘우리가 돕겠다’는 사람들이 있어 다시 시작했는데 빚만 2,3 억 원을 지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3년째 열리지 않았다. 2010년부터는 산을 달리는 행복트레일런대회도 개최했다. 역시 자선 대회다. 매년 11월 셋째 주 일요일에 개최하는 행복트레일런대회는 코로나19에도 계속 열었다.

50년 넘게 달렸는데 그동안 부상은 없었을까.
“전혀 없었어요. 다치는 사람은 테크니컬 에러 때문입니다. 먼저 몸을 만들고 그에 맞는 강도로 달려야 하는데 몸은 안 만들고 마음만 따라가니 무리를 하고 다치는 것입니다. 사망사고도 그래서 발생하죠.”

이동윤 원장이 서울 서초구 잠원동 공원에서 나무에 기대 활짝 웃고 있다. 그는 ‘국민 전체가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달리며 ‘달리기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이 원장은 ‘운동 전도사’이기도 하다.
“우리 몸 자체가 안 쓰면 퇴화됩니다. 도태되는 것이죠. 근육도 안 쓰면 몸 자체적으로 없애버립니다. 그게 우리 몸의 생존 본능입니다. 열심히 움직여야 합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마음도 살아 있지 않죠.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짜증을 내는데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몸에서 받아줄 자신이 없으니 짜증으로 회피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하면 어떤 스트레스도 받아 줄 수 있는 몸이 됩니다.”

이 원장은 풀코스를 200번 가까이 완주했지만 이젠 대회 출전은 거의 하지 않는다. 10여년 전 대한외과의사회 일을 보면서 시간을 내지 못하면서 출전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젠 혼자서 달리는 게 더 좋다.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을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건강해야지라는 생각은 안 됩니다. 그럼 운동을 하지 않아요. 목표를 세우고 달려야 합니다. 호주 원주민들을 하루 20km를 걷고 달렸어요. 인간은 매일 아침저녁 합쳐서 20km는 달려야 한다고 봅니다. 주말엔 토요일 일요일 70km를 달리야 진정한 마라토너 아닐까요? 전 그 목표로 달리고 있습니다.”

이 원장은 이제 ‘인생 3막’이 시작됐다고 했다.
“국방부 보건과장(예비역 대령)으로 국가에 봉사하며 1막을 살았고 외과의학발전을 위해 2막을 살았죠. 3막은 아내와 여생을 즐겁게 보내는 것입니다.”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