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테세우스의 배는 어디에
테세우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테네 왕이다. 그와 관련된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이야기다.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는 황소와 교접하여 몸은 사람이지만 머리는 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이에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에게 한번 들어가면 쉽게 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을 만들게 하고, 거기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고 젊은 남녀 각각 7명을 제물로 바쳤다.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크레타섬의 미궁에 관한 이야기를 묘사한 15세기(추정) 그림. 작자 미상. 사진 출처 영국박물관 홈페이지
카우프만이 1774년 이후에 다시 그린 아리아드네. 화면 오른쪽으로 멀리 테세우스의 배가 보인다. 이루어지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을 탄식하듯 사랑의 신 에로스가 아리아드네의 옆에 앉아 울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스위스 화가 앙겔리카 카우프만이 1774년 그린 그리스 신화 속 아리아드네. 화면 왼쪽 끝에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 테세우스의 배다. 아테네인들은 썩은 판자를 새 판자로 교체하면서까지 이 배를 보존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원본의 변화와 함께 발생하는 정체성 문제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진다. 한 국가에 이민자가 늘어나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한다면 그 나라의 정체성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가 등이다. 사진 출처 위피키디아
저서 ‘몸에 대하여’에서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한술 더 뜬다. 만약에 테세우스의 배에서 나온 낡은 판자들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 똑같은 배를 만든다면, 그 배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새로운 판자로 개비한 첫 번째 배와, 낡은 판자를 사용해 만든 두 번째 배 중 어느 것이 진정한 테세우스의 배인가? 만약에 현재의 한국인들이 모두 어디론가 이민 가서 나라를 세우고, 현재 한반도에는 외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둘 중 어느 나라가 진정한 한국인가? 단군의 자손이라는 신화적 설명으로 과연 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홉스의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다. 낡은 판자들을 모아 또 하나의 배를 만들면 뭐 하나, 그 낡은 판자들 역시 예전 그 판자들이라는 보장이 없는데. 세월의 풍화를 거치면서 그 판자들도 많이 변형되었을 것이다. 30년 전 당신과 현재의 당신은 같은 사람인가? 당신의 세포와 마음은 30년 전과는 꽤 다를 텐데? 혹시 별도의 인물은 아닌가? 만약에 자신의 유전자를 더 고스란히 잘 간직하고 있는 복제인간이 있다면? 그가 혹시 진정한 당신은 아닌가?
이런 질문은 이민자들의 나라에 좀 더 익숙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미국 사람들은 좀처럼 지역이나 혈통을 가지고 미국의 정체성을 정의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이 자주 들먹이는 것은 “미국은 하나의 관념이다(America is an idea)”라는 말이다. 정치인이나, 언론이나, 유명인들이 잊을 만하면 이 말을 들먹이고, 이것이야말로 다른 나라와는 다른 미국만의 특징인 것처럼 말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작년 현충일에 미국은 하나의 관념이라는 말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것이야말로 중국과 러시아 같은 다른 강대국과는 구별되는 미국만의 특징인 것처럼.
한국의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고, 정부는 엄청난 예산을 들이면서도 그 흐름을 바꾸는 데 꾸준히 실패하고 있다. 한국이 유지되려면 아마도 상당 규모의 이민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제 한국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때가 오고 있다. 어쩌면 이미 왔다. 언젠가는 한국 대통령도 말할지 모른다. 한국은 하나의 관념이라고.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