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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김지현]9년 전 “날 소환하라”더니 이젠 “무례하다”는 문재인

입력 | 2022-10-18 03:00:00

김지현 정치부 차장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둘러싼 사법리스크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이재명을 싫어하는 ‘문빠’들 사이에 전설처럼 등판하는 사진이 있다. 2013년 11월 6일 지지자들의 ‘안개꽃 응원’을 받으며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던 문재인 전 대통령(당시 민주당 의원)의 모습이다.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한 문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 의혹이 이어지자 2013년 10월 검찰을 향해 “죄 없는 실무자들을 괴롭히지 말고 나를 소환하라”고 정면승부를 선언했다. 그는 당시 낸 보도자료에서 “국민이 원하는 건 진실 규명을 끝내고 소모적 논란과 정쟁에서 벗어나 정치가 민생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실제 검찰에 참고인으로 소환된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까지 띤 채 여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해 안개꽃을 들고 나온 150여 명의 지지자들로부터 환호를 받으며 검찰로 들어섰다. 지금도 열혈 ‘문빠’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는 명장면 중 하나다. 한 문재인 지지자는 “켕기는 게 없는 사람한테선 저런 결기가 느껴질 수밖에 없다”며 “(이재명도) 검찰, 경찰 수사에 대리인을 보내지 말고 저렇게 당당하게 임해야 한다”고 했다.

그로부터 딱 9년이 지난 지금, 감사원의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관련 서면조사 통보에 “대단히 무례한 짓”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는 문 전 대통령에게서 저때의 결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문 전 대통령 측은 지난달 말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점검 감사와 관련해 사실관계 등을 명확히 규명하고자 질문서를 송부하고자 한다”는 감사원의 e메일을 이틀 만에 반송했다. 구체적으로 뭘 묻는 건지 확인하기도 전에 ‘정치보복’ 프레임부터 꺼내들며 거부한 것이다. 민주당 윤건영 의원은 기자회견까지 열어 문 전 대통령의 격앙된 반응을 전하며 “반송은 수령 거부의 뜻”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민주당도 ‘상왕’의 분노를 받들어 국정조사 추진 및 감사원장 고발, 감사원법 개정안 발의 등 ‘총공세’에 나섰다.

하지만 감사원법 제50조에 따르면 감사원은 감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필요하면 전직 대통령에게도 감사원장 명의의 질문서를 보낼 수 있다. 1993년 노태우 전 대통령과 1998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각각 율곡사업 의혹과 외환위기 특별감사에 대해 답변서를 냈다. 감사원은 2017년과 2018년엔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도 각각 질문서를 보내려 했지만 이들이 수령을 거부해 못 보냈다고 한다. 문 전 대통령은 차마 ‘조용히’ 거부하긴 싫었는지 이를 굳이 정치 이슈로 키웠다. 덕분에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열린 첫 국회 국정감사는 첫날부터 신구 권력이 정면충돌하는 볼썽사나운 ‘정쟁 국감’이 돼버렸다. 그가 9년 전 보도자료에 적었던 ‘진실 규명’과 ‘민생을 위한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지난 8월 전당대회에서 승리하고 다음 날 자신을 찾아온 이 대표에게 문 전 대통령은 “나와 이 대표를 지지하는 그룹이 같다”며 이재명의 ‘명’과 문재인의 ‘문’을 딴 ‘명문’ 정당을 만들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의 말마따나 두 사람이 어느덧 서로를 똑 닮아가고 있는 듯하다.




김지현 정치부 차장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