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가 적나라한 누드 그린 이유
김민 국제부 기자
얼마 전 서울에서 열린 국제 아트페어에서 오스트리아 작가 에곤 실레(1890∼1918) 작품을 보려는 관객이 몰렸었죠. 저도 사람들 틈에 끼어 작품을 감상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유명한 에곤 실레가 그린 것이 아니라면 이 그림들을 예술로 볼 사람은 얼마나 될까?”
너무 삐딱한 생각인가요? 그래도 상상을 더 전개해 보겠습니다. 한국의 이름 모를 누군가가 그렸다고 한다면, ‘이 작가 변태 아니야?’라는 반응도 분명히 나왔겠죠. 그런 의견이 모이면 선정성 논란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봐도 노골적인 실레의 누드
에곤 실레의 1917년 작품 ‘포옹’. 이 그림을 그리기 2년 전 결혼한 실레는 부인에게 안겨 있는 모습을 포근하고 따뜻하게 그렸다. 이에 비해 결혼하기 전 실레의 누드 작품들은 불안하고 격정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실레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주민들 때문에 집을 옮겨 다니기도 했고요. 1912년에는 ‘공공 부도덕’ 혐의로 감옥에서 24일을 보냅니다. 동네 아이들이 드나드는 작업실에 음란한 그림을 걸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당시 사회가 그의 작품에서 예술성을 봤다면 그를 감옥에 가두진 않았겠죠.
실레가 비난을 무릅쓰고 누드를 그린 개인적 이유는 주류 아카데미 예술에 저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실레는 그림을 잘 그렸지만 아카데미의 엄격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방황하던 그를 반아카데미파였던 구스타프 클림트가 알아봐 주었습니다. 용기를 얻은 실레는 자신의 감각에 깊이 다가오는 것들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아카데미에서는 예술이라 여기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누드였습니다.
분열 직전의 세기말 도시, 빈
그러나 아카데미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유만으로 실레의 누드가 설명되진 않습니다. 이번엔 19세기 말∼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으로 시야를 넓혀 보겠습니다.오스트리아제국은 신성로마제국부터 이어온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는 ‘구 왕정체제’의 본산이었죠. 그러나 1848년 유럽 곳곳에서 체제를 뒤엎는 혁명이 일어나 제국 내 다양한 민족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합니다. 분열 위기에 처한 제국은 헝가리와 손잡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세우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제국은 무너지게 됩니다.
역사학자 필리프 블롬은 분열 직전의 제국에서 빈은 욕망이 넘쳐나는 ‘유럽의 라스베이거스’였다고 표현합니다. 1910년 빈은 인구 200만 명으로 세계 6위 규모의 대도시였습니다. 빠르게 산업화된 제국의 화려한 도시에 부와 명예를 좇아 온갖 지역에서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하수구에 살았던 노숙자들은 당시 ‘두더지 인간’이라고 불렸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비엔나커피의 달콤한 크림 같은 욕망
당시 빈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제시한 바를 증명이라도 하듯 성적 욕망이 분출되는 도시였습니다. 1904년경 빈의 성매매 종사자는 3만∼5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또 1850년대부터 카메라의 발명으로 포르노 사진이 유행합니다.성매매 산업과 포르노가 성적 욕망을 돈으로 착취했다면, 실레는 이 욕망을 인간의 한 속성으로 기록합니다. 도시의 화려함에 가렸던 치부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욕망은 빈으로 몰려든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을 공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요소였습니다. 프로이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성욕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을 이해한 것처럼 말이죠.
빈에서 만들어진 아인슈페너(비엔나커피)도 그런 도시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쓰디쓴 커피를 하얀 크림으로 덮듯, 세기말 도시의 쓴맛을 달콤한 욕망으로 이겨내려 했기 때문이죠. 비록 그 단맛을 과하게 탐닉해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지라도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실레의 아버지도 성병으로 사망했죠.
우리가 실레의 그림을 예술로 보는 이유. 그것이 우리를 1900년대 빈으로 데려가, 모순 속에 살면서 좌절하며 욕망에 탐닉했던 사람들의 불안함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비뚤어진 욕망이 폭력적으로 흘러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을 환멸에 빠지게 만들 것임을 예견했을지도 모릅니다. 실레의 누드에서 이런 감정, 여러분도 느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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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국제부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