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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세계 시민의 자세

입력 | 2022-10-19 03:00:00

핵전쟁 피하면서 러·中 다루려면 새로운 봉쇄와 압도적 군사력 필요
북한도 러·中과 함께 다룰 때 효과적… 거대 악과 맞서는 일엔 고통 따른다



송평인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세계 시민’을 언급했다. ‘세계 공화국’과 한 묶음인 ‘세계 시민(weltbürger)’이란 말은 칸트에서 비롯됐다. 칸트가 실제 언급한 것은 세계 공화국이 아니라 민족연합(民族聯合·völkerbund)이다. 하지만 독재가 아니라 공화적 가치가 중심이 된 민족들의 연합은 세계 공화국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 공화국을 통한 영구평화(永久平和)는 철학에서나 하는 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사를 겪고 난 뒤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이 탄생했다. 이 명칭은 칸트의 민족연합을 영어로 직역한 것이다. 물론 말만 그럴 뿐이다. 국제연맹도, 그 후신인 국제연합(United Nations·유엔)도 세계 공화국과는 거리가 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명백한 잘못에도 유엔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러시아의 거부권 때문이다. 유엔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나머지 국가들에 우월성을 갖는 체제다. 그런 점에서는 19세기 빈 체제나 다를 바 없다. 전승국의 우월성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5개국이 상임이사국으로서 갖는 거부권으로 나타난다. 이들 국가는 나중에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만들어 핵무기를 보유할 권리까지 독차지함으로써 우월성의 군사적 토대를 완성했다.

유엔 체제는 정확히는 전승국 중에서도 핵 선제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아 응징할 수 있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세 나라의 핵 균형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핵무기 사용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지만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하는 순간 NPT는 깨지고 NPT가 그 위에 서 있는 유엔 체제도 끝난다.

유엔 체제는 핵전쟁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 핵전쟁은 인류의 전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후의 체제가 있을 수 없다. 어렵기는 하지만 핵전쟁을 피하면서 유엔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뒤이은 공산권의 몰락을 초래한 내파(內破·implosion)다. 전쟁과 같은 외부적 힘에 의해 초래되는 외파(外破·explosion)가 아니라 스스로 무너진다는 점에서 내파다. 물론 내파라고 해서 순수하게 스스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공산권의 내파는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봉쇄(containment) 정책의 결과였다.

지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더라도 서방의 제재를 피할 수 없고 또 한 차례의 내파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스스로 무너지던 중국을 수교를 통해 구해주고 세계화에 합류시켜 준 것은 미국이다. 그런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신(新)봉쇄 정책으로 돌아섰다. 군사적으로 아시아·태평양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라고 할 수 있는 쿼드를 출범시키고, 경제적으로는 중국을 배제하고 동맹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급망을 짜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나 중국이 전술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정밀하고 압도적인 재래식 무기로 초토화시키는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재래식 군사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러시아에 대해 상응하는 핵무기를 쓰지 않고도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미국과 나토의 자신감은 그로부터 왔다. 시진핑이 연임된 후 대만 침공을 시도해도 미국과 아시아 국가의 협력 태세가 확고하면 중국의 전술핵무기 사용 위협에 핵전쟁을 피하면서 대응할 수 있다. 물론 전술핵무기가 아니라 전략핵무기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공멸을 뜻하기 때문에 더 생각할 것도 없고 단지 인간 유전자 속에 새겨진 자멸 본능을 한탄해야 할 것이다.

북한에 대한 제재가 통하려면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봉쇄가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북한의 핵 도발 역시 중국과 러시아의 핵 도발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때 막을 수 있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북한을 다룰 실효적인 궤도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다.

봉쇄는 봉쇄하는 측에도 고통을 요구한다. 세계가 지금 겪고 있는 경제위기가 그것이다.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도 인적 물적 고통을 수반한다. 열정(passion)은 동시에 고통이다. 그 고통을 견뎌낼 각오가 세계 공화국을 준비하는 세계 시민의 자세일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