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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 폭 좁히는 미니정원… 주민들이 직접 ‘걷고싶은 환경’ 디자인

입력 | 2022-10-19 03:00:00

[보행자에 진심인 사회로]〈15〉英 도로정책 핵심 ‘거리 매뉴얼’
차량에서 보행자로 우선순위 전환
제한속도 32km 이하 환경 조성 등 원칙 제공하되 지역별 특색 가미
미니정원 조성 런던 ‘복스홀 워크’ 자연스레 車속도 줄이는 구조로
회전로터리 폐쇄 후 광장 만들기도



지난달 28일 영국 런던 램버스 지역 ‘복스홀 워크’ 거리에서 시민들이 산책하고 있다. 차도 중앙에 차도 폭을 좁혀 차량 운행 속도를 낮추기 위한 ‘미니 정원’이 설치돼 있다. 런던=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지난달 28일 영국 런던 템스강 인근 램버스 지역 ‘복스홀 워크’ 거리. 약 360m 거리를 따라 주민들이 한가롭게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거리 한가운데는 가로 1.5m, 세로 13m의 ‘미니정원’이 45m 간격으로 조성돼 있었다. 길을 가던 시민 일부는 걸음을 멈추고 정원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다. 지나가던 차량은 속도를 줄이거나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움직일 때까지 멈춰 기다렸다.

복스홀 워크는 영국에서 ‘차량 중심’의 도로를 ‘보행자 중심’으로 바꾼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정원 때문에 차도 폭이 절반 가까이로 축소되면서 자연스럽게 차량 속도를 줄이는 구조다. 로버트 싱글턴 영국 교통부(DfT) 과장은 “단순히 차량 이동을 통제하는 것을 넘어 시민들에게 ‘걷고 싶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영국 교통 시스템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 보행자 위한 백과사전, ‘거리 매뉴얼’

교통부는 2007년 ‘거리 매뉴얼(Manual for Streets·MfS)’을 발표했다. ‘차량에서 보행자로의 우선순위 전환’이 주 내용이다.

영국의 도로 정책은 원래 차량 이동을 제한하는 것에 집중했다. 하지만 지역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탓에 교통 혼란을 야기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결국 교통부는 기존 도로 정책을 폐지하고 새 매뉴얼을 발표했다. 주민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 자율적으로 거리 환경을 꾸밀 수 있도록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매뉴얼은 거리 디자인 개선을 통해 주민들의 안전성과 문화 접근성 등을 높이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도심 내 환경오염 해결에도 초점을 뒀다. 주요 원칙은 △다양한 연령 및 신체·인지 능력의 보행자를 수용할 것 △제한속도 시속 20마일(약 32km) 이하 환경을 조성할 것 △지역 사회 통합 강화에 기여할 것 △지속 가능한 디자인을 적용할 것 등이다.

교통부는 2010년 두 번째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간선도로를 제외한 모든 도로에 매뉴얼이 적용되도록 범위를 확대했다.

동아일보가 지난달 27∼30일 둘러본 런던 도심은 거리 매뉴얼이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돼 있었다. 지역 문화유산이나 환경 보존이 필요한 구역에 산책로를 만들기도 했고, 우범 지역에 가로등을 설치하고 시민 문화 공간을 조성하기도 했다.

시티오브런던 내 최대 시민 공간인 앨드게이트 광장은 불과 7년 전까지 4개 진입로로 구성된 복잡한 회전로터리였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마다 보행자와 차량이 얽혀 극심한 교통체증이 빈번하자 교통부는 로터리를 폐쇄하고 2018년 광장을 완성했다.

이후 퇴근시간 광장에는 학생들이 모여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직장인들이 벤치에 앉아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런던 시민 사이먼 레이컨 씨는 “광장이 생긴 뒤 더는 ‘재앙 같은’ 출근길을 겪을 필요가 없어졌다”며 “여유롭게 벤치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고 했다.

주민들이 직접 지방 정부에 요청해 안전한 횡단보도를 조성한 사례도 있다. 남부 램버스의 리처드 앳킨스 초등학교 인근 지역은 2010∼2014년 총 12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정도로 악명 높은 장소였다. 학부모들의 요청으로 2015년 올록볼록한 모양의 넓은 보도와 노란색과 빨간색을 활용한 횡단보도가 학교 주변에 설치됐다. 램버스 당국은 횡단보도 설치 후 5년 동안 차량 운행 속도는 약 27%, 통행량은 14% 줄었다고 밝혔다.

싱글턴 과장은 “거리 매뉴얼의 핵심은 주민들이 필요에 맞게 직접 거리를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통부는 올해 안에 지난 두 버전의 매뉴얼을 통합한 3번째 개정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 도심 내 엄격한 속도 제한 적용
런던은 2020년 3월부터 ‘혼잡통행료 부과지역(CCZ)’ 제한 속도를 ‘시속 20마일 이하’로 낮췄다. 앞서 2018년 사디크 칸 런던 시장은 2041년까지 도시 내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0’으로 줄이겠다는 야심 찬 목표 ‘비전 제로(Vision Zero)’를 선언했다. 이동 수단의 80%를 보행, 자전거, 대중교통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이후 런던 도심에선 구조물이나 도로 디자인을 개선해 속도를 줄이고 있다. 지그재그형 차선을 이용하거나 장애물을 설치해 도로 폭을 축소시키기도 했다.

아예 차량 진입 자체를 막는 구역도 늘었다. 예를 들어 시티오브런던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비숍게이트’ 거리 일부 구간(약 600m)은 평일 오전 7시∼오후 7시 버스와 자전거를 제외한 차량 진입을 막고 있었다. 차량 통행이 허용되는 시간에는 ‘시속 20마일 이하’ 정책이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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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