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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해지는 거품의 추억…일본 집값은 왜 오르지? [딥다이브]

입력 | 2022-10-19 08:03:00


요즘 국내 부동산시장이 꽁꽁 얼어붙었죠. 초급급매가 아니면 거래가 아예 끊겼는데요. 이대로부동산 시장이 침체에 빠지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옵니다. 사실 한국만의 일이 아니죠. 중국 주택시장은 부동산 규제 직격탄으로 휘청이고 있고, 미국 주택시장역시 기준금리 인상으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주택시장이 꽤 탄탄한, 오히려 집값이 꾸준히 오르는 나라도 있습니다. 바로 일본인데요. ‘어? 일본? 거긴 예전에 부동산 버블 터지고 나서 집값 안 오르잖아’라고요? 모르시는 말씀. 일본 주택시장은 꽤 탄탄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답니다.

일본 도쿄의 스카이라인. 게티이미지

높으니까 좋네, 타워맨션
‘전국 평균 주택 지가(地價) 31년 만에 상승’.  지난달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국토교통성이 해마다 발표하는 주택용 기준지가(전국 평균)가 전년보다 0.3% 올랐는데, 이게 플러스를 기록한 게 1991년 이후 처음이라는 겁니다(세상에, 30년 동안 마이너스였다니!).   

땅값보다 집값은 더 일찌감치 오르기 시작했는데요. 2010년 아주아주 찔끔 집값이 상승세로 돌아서더니,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자, 왜 2013년일까요? 바로 아베노믹스 때문! ‘잃어버린 20년’에 갇힌 일본 경제를 살리겠다며 아베 정권이 돈을 막 풀기 시작한 그때부터 주택가격이 본격적으로 오른 겁니다. 

늘 그렇듯이 집값은 오르는 곳만 더 오르는 경향이 있죠. 일본에선 당연히 도쿄 집값이 가장 빨리, 많이 오르고 있습니다. 지난해 도쿄 23구의 신축 맨션 평균가격이 8449만 엔으로 드디어 버블기 수준을 30년 만에 뛰어넘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고 해서 언론이 호들갑이었는데요(단, ㎡당 가격은 아직 더 낮음. 1991년 151만 엔>2021년 130.8만 엔).

도쿄 23구의 중고 맨션 평균 가격(빨간 선)은 7월 6846만 엔에서 8월엔 6884만 엔으로 뛰었다. 26개월 연속 상승. 도쿄칸테이 보도자료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부동산 시장이 영 맥을 못 추는 2022년이지만 일본만은 트렌드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도쿄칸테이(일본 부동산데이터 기업) 자료를 보면 도쿄의 70㎡(=일본 국민평형) 중고 맨션(신축 아님) 평균 가격은 8월에 6884만 엔을 기록했는데요. 26개월 연속으로 오른 겁니다. 2년 전보다 20% 가까이 뛰었죠. 2013년(3995만 엔)과 비교하면 72% 상승. 

일본에서 집값 상승을 맨 앞에서 이끄는 건 ‘타워맨션’입니다. 이름만 들어서 타워맨션이 뭔지 감이 안 오신다면 사진으로 보시죠.  

도쿄 신주쿠의 60층짜리 타워맨션. 노무라부동산 홈페이지

도쿄 미나토구 롯폰기의 48층짜리 타워맨션. 노무라부동산 홈페이지

도쿄 미나토구 타워맨션의 거실 모습. 4억2500만 엔짜리 매물. 노무라부동산 홈페이지

사진을 보고 ‘서울의 주상복합 아파트랑 비슷한데?’라고 생각하실 텐데요. 여기서 잠깐. 일본에서는 ‘맨션(일본 발음으로는 ‘만숀’)’이 우리가 생각하는 아파트입니다. 일본어로 ‘아파트’라는 용어도 있는데 그건 주로 임대로 운영하는, 우리로 치면 빌라와 비슷한 느낌. 

타워맨션은 맨션 중에서도 20층(60m)이 넘는 고층 맨션인데요. 1997년 용적률 규제가 풀리면서 등장했습니다. 특히 도쿄의 입지 좋은 곳에(예를 들어 ‘도쿄의 강남구’라 할 수 있는 미나토구나 도쿄만 전경이 펼쳐지는 오다이바 등) 럭셔리한 타워맨션(피트니스센터, 게스트룸, 스카이라운지, 도서관을 갖춘)이 속속 들어섰죠. 

이런 타워맨션은 ‘억션’이라고도 불립니다. 일본의 국민평형에 해당하는 70㎡짜리도 시세가 1억 엔이 훌쩍 넘어가서 붙여진 별칭인데요. 과거 버블기(무려 30년 전)에 등장한 이 ‘억션’이라는 단어는 부동산 거품의 상징이었는데, 억션이 부활한 셈! (엥, 1억 엔이면 현재 환율로 9억6400만원이니까 서울 일반 아파트랑 비슷하네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아시다시피 일본은 임금수준이 한국보다 낮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어려워요.) 

그럼 이런 타워맨션은 주로 누가 살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단어가 ‘파워 커플’입니다.
새로운 세대의 등장, 파워커플

붐비는 출퇴근 시간 일본 지하철. 게티이미지

1980년대 후반 무섭게 부풀었던 일본 부동산 시장 버블이 1991년 터졌죠. 일본은행이 경기 과열을 막겠다며 기준금리를 무지막지하게 올린 데다(1989년~1990년 2.5%→6.0%로 인상), 주택담보대출까지 뒤늦게 조이면서 돈줄이 막힌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는데요. 이후 2009년까지 무려 20년간 부동산 시장이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주택 구매자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선 ‘부동산에 투자한다’는 개념 자체가 희미해졌죠. 집을 사봤자 감가상각 때문에 점점 가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부동산(不動産)이 아니라, 부담만 주는 애물단지여서 부동산(負動産)이란 말이 등장했을 정도. 

그런데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어요. ‘파워 커플’이라고 부르는 20~30대 맞벌이 부부들인데요. 그냥 맞벌이가 아니라 각각 연소득이 700만 엔 이상인(합치면 1400만 엔) 고소득 커플이죠. 

파워 커플은 부모 세대와 달리 집값 폭락을 경험한 적이 없어요. 출퇴근 힘드니까 비싸도 도심에 살고 싶어하죠. 월 15만 엔의 비싼 월세를 내기 아까우니까 차라리 집을 사자는 생각도 하고요. 한국인과 비슷한 사고방식?  

일본의 만기 35년 장기고정금리 대출인 플랫35의 10월 적용금리는 1.48~2.97%이다(위 사진). 대출금리는 만기가 짧으면 더 낮아진다. 금리 추이를 보면 2022년 들어 조금씩 오르고 있다(아래 그래프). 플랫35 홈페이지

그래서 실수요자인 파워 커플들이 타워맨션 트렌드를 이끄는데요.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좋은 집에 살고 싶다는 이들의 욕구는 더욱 증가. 이제는 그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할 지경입니다.

시장 원리에 따라 타워맨션 가격이 쑥쑥 오르면서, 사려는 사람들은 더 늘어만 갑니다. 어느덧 타워맨션 거주=럭셔리 라이프=동경의 대상’이란 이미지가 생기면서 욕망을 자극! 이제 도쿄 시내뿐 아니라 교외에도 타워맨션이 속속 들어서고 있는데요. 역세권이면 분양 받으려는 사람이 줄을 섭니다. 일본은 지진이 많기 때문에 내진설계가 잘 돼있는 신축 타워맨션이 더 안전하다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다는 군요.
일본도 ‘벼락거지’ 걱정?
능력 있는 젊은 실수요층이 도심의 비싼 집을 사는 거야 자연스러운 현상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일본에선 슬슬 걱정스러워 하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맨션을 사지 못한 중산층의 한탄이 이어지고 있어서죠. 1~2년 전 한국 집값이 치솟으면서 ‘벼락거지’라는 우울한 얘기가 나왔던 때와 살짝 비슷한데요. 

최근 니혼게이자이 기사엔 이런 사례가 소개됐습니다.
“맨션을 사는 건 부유층의 특권인가?” 요코하마시 임대 맨션에서 사는 직장인 산와 나오코(38)씨는 한숨을 쉰다. 그는 몇 년 전부터 도심 근교 맨션을 찾아왔다. 상한선인 6000만 엔대를 넘는 고액 물건이 늘어나, 검색 사이트를 바라보며 초초한 나날을 보낸다.

얼마 전까지의 한국 젊은 세대의 모습과 많이 닮았는데요. “거주의 대상에서 투자 대상이 된 맨션이 자산을 가진 자와 갖지 않은 자의 격차를 벌리고 있다”는 기사 속 일본의 부동산 전문가 멘트도 마치 한국 이야기 같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한국에선 늘 부동산은 가장 중요한 투자대상이었지만, 일본에선 투자대상이 된 게 30년 만이라 너무나 새로운 현상이라는 점.

엔저 덕분에 일본 부동산은 해외 투자자들에게 바겐세일 중이다. 게티이미지  

엔저를 노린 외국인 투자자들이 밀려들어오고 있는 것도 일본인 입장에선 신경쓰이는 부분입니다. 해외 투자자들은 가격 상승을 노리고 주로 도쿄의 타워맨션 위주로 사들이는데요(일본에선 단독주택은 사봤자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무조건 타워맨션 선호). 특히 엔화가치가 왕창 하락하면서 요즘 해외 투자자에겐 일본 맨션이 ‘바겐세일’ 중. 투자 열기가 꽤 뜨겁습니다. 중국인들이 수천만 엔짜리 도쿄 주택을 100% 현금으로 사버리고 있다는 뉴스가 일본 언론에선 심심찮게 나옵니다. 장기체류자가 아닌 외국인이 일본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법인을 세워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니까 아예 현금으로 사버린다는 거죠. 물론 한국에서도 일본 타워맨션 투자를 알아보는 분들이 꽤 있다고. 

‘빈집이 이렇게나 많은 데도 타워맨션 분양이 끊이지 않다니. 뭔가 이상한 거 아니야?’ 이런 걱정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이른바 ‘주택과잉 사회’라는 문제의식인데요. 일본엔 빈 집이 849만 채나 됩니다. 전체 주택의 13.6%가 비어있는데요(2018년 기준). 달리 보면 경제성장이 둔화될수록 일자리가 집중된 대도시 핵심 지역의 신축 주택 수요만 더 견고해진다는 점을 일본 부동산 시장이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맨션 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는 저금리가 언제 종말을 맞이할 지 모른다.’ ‘엔고가 시작되기라도 하면 외국인 투자자는 썰물처럼 사라지고 집값이 폭락할 거다.’ 30여 년 전 부동산 버블과 폭락기를 모두 지켜봐온 일본의 전문가들은 끊임없이 경고음을 내고 있는데요. 원래 버블은 꺼진 뒤에야 버블임을 알 수 있는 법. 아직은 탄탄한 실수요층과 오를 줄 모르는 초저금리를 볼 때 일본 주택시장이 좀더 갈 거란 전망이 대세입니다. By.딥다이브  

일본 주택시장 이야기 잘 보셨나요? 혹시 이걸 보시고 ‘그래, 나도 도쿄에 맨션을 사야 겠어!’라고 하실까봐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요(막상 투자하려면 세금과 복비 등 복잡한 이슈가 꽤 있다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도쿄를 포함한 일본 수도권 집값은 버블기(1991년)를 넘어 사상 최고를 기록 중입니다. 특히 ‘타워 맨션’이 인기를 끌고 있죠.‘버블의 충격’을 모르는 젊은 파워커플의 실수요가 도심 집값 상승을 주도합니다. 연소득의 7~8배 대출을 받으면 ‘억션’도 척척 살 여력이 되니까요.  여기에 엔저 바겐세일을 노린 해외 투자자들까지 가세 중. 일본에서도 집 못 산 중산층의 ‘상대적 박탈감’이 다시 사회적 이슈가 될 판입니다. 
*이 기사는 1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일부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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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