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만에 최저… 주요국중 최대 하락
달러당 엔화 환율이 149엔을 돌파한 가운데 19일 일본 도쿄에서 한 시민이 환율 전광판 앞을 지나고 있다. 도쿄=AP 뉴시스
달러 대비 일본 엔화 가치가 32년 만에 최저로 떨어지며 시장의 심리적 마지노선인 150엔 돌파가 초읽기에 들어가자 일본 금융당국 수장들이 환율 방어를 위한 적극적인 구두(口頭) 개입에 나섰다. 3월만 해도 엔화 약세(엔저)에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던 중앙은행 수장이 19일 엔화 가치 하락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입장을 바꿨고 정부는 1개월여 만에 또다시 환율 개입에 나설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세계 최대 수준의 국가 채무, 약해진 제조업 경쟁력 등 때문에 엔화 가치 하락을 막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선진국으로서 수십 년간 해외에 쌓아놓은 자산 덕에 당장 경제 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낮지만 경제 체력 저하에 따른 구조적 불황을 당분간 타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 日 금융당국, 환율 재개입 태세
19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한때 149.70엔을 넘으며 1990년 이후 최고 수준까지 올랐다. 환율 상승은 해당국 통화 가치 하락을 의미한다. 엔화 가치는 지난해 말 대비 29.8% 떨어지며 주요 7개국(G7)은 물론이고 한국 중국 등과 비교해도 가치 하락률이 컸다.150엔 돌파가 초읽기에 들어가자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중앙은행) 총재는 이날 국회에 출석해 “급속하고 일방적이라 경제에 마이너스(―)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구로다 총재는 “안정적 엔저라면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치겠지만 영향력은 업종, 기업 규모, 경제 주체에 따라 다르다”고도 설명했다. 구로다 총재가 3월 “엔저는 일본 경제에 플러스(+)로 작용한다”고 언급한 것과는 정반대 입장이다.
○ 저금리-구조적 경쟁력 약화에 악순환
엔화 가치 하락의 단기적 최대 요인은 미국과의 기준금리 격차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 상단을 연 3.25%까지 끌어올렸음에도 일본은 단기금리 ―0.1%, 장기금리 0%의 ‘제로금리’를 고수하며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더 큰 이유는 일본 경제의 구조적 침체다. 과거에는 환율이 오르면 수출 가격이 낮아져 무역수지 흑자에 도움이 됐지만 지금은 다르다. 제조업 공장들이 잇따라 해외로 빠져나가고 가전, 반도체 등의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환율 상승이 되레 수입 천연가스,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물가를 자극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엔저→수출 증가 미미→원자재 수입가 상승→달러화 수요 증가→환율 상승’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거품경제기 이후 최저 수준인 엔화 가치는 일본 경제의 구조적 약점을 상징한다”며 “에너지 수입 의존, 생산 거점 해외 이전 등으로 무역수지 적자가 구조화돼 실수요자들의 엔화 매도가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야카와 히데오 도쿄재단 정책연구소 연구원은 아사히신문에 “금융 완화 장기화로 금리 리스크에 대한 감각이 마비돼 정치인들이 재정 규율을 무시하고 확장 재정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