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형 기자
제로백. ‘0’을 뜻하는 영어 ‘제로’에 숫자 백(100)을 붙여 놓은 이 단어는 차의 가속력을 보여주는 숫자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에 도달하는 시간으로 초반 가속력을 측정하는 것이다. 가족용 차라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겠지만 스포츠카라면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겠다.
최근 기아는 전기차인 EV6 GT 모델(사진)에서 제로백이 3.5초라는 점을 홍보 전면에 내세웠다. 한국 자동차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속력을 보여준다는 마케팅이다. 실제로 국내에서 대량 생산된 차 가운데 3.5초보다 빠른 차는 없었다. EV6 GT는 가장 폭발적인 초반 가속력을 가진 국산차가 맞다.
하지만 EV6 GT의 제로백에는 초반 가속에서 내연기관차보다 훨씬 유리한 전기차의 특성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이 사실이다. 내연기관차의 엔진은 가속 페달을 밟는 즉시부터 최대의 힘을 내지 못한다. 게다가 속력을 높일 때 필수적인 변속 과정도 빠른 가속을 방해한다. 그래서 내연기관차는 5초 안팎의 제로백만 보여줘도 가속력이 준수하다고 인정받아 왔다. 반면에 전기차는 페달을 밟는 그 순간부터 모터가 최고의 힘을 낼 수 있고 변속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이번 ‘제로백 마케팅’에는 작지 않은 의미가 담겨 있다.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과거보다 다채로워지는 전기차의 마케팅 포인트다. 오랫동안 전기차의 최대 장점은 경제성이었다. 휘발유·경유 가격보다 훨씬 낮은 충전 요금에 각국 정부의 구매 보조금이 더해지면서 높은 경제성으로 각광받았다.
전기차 대중화는 자연스레 보조금 축소와 충전 요금 현실화를 불러오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전기차는 이제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실제로 테슬라는 첨단 소프트웨어와 자율주행 기술을 강조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나 아우디가 프리미엄 전기차 시장을 개척할 때 현대차그룹은 높은 공간 활용도를 주무기로 내세우기도 했다.
분당 2만1000번까지 회전하는 고성능 전기 모터를 쓰는 EV6 GT는 기존의 EV6보다 더 비싸다. 당연히 덜 ‘경제적’이다. 그럼에도 대중 브랜드인 기아가 이런 차를 내놓는 것은 전기차 시대에도 ‘잘 달리는 차’를 찾는 수요가 존재할 것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무거운 배터리를 바닥에 깔고 있는 전기차는 무게중심 측면에서도 고성능차 구현에 유리하다.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카 브랜드 중 하나인 머스탱이 첫 전기차 모델 ‘마하-E’를 내놓으며 가장 부각시킨 것 역시 강렬한 주행 성능이었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