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성 가을바람 바라보다, 집 편지 쓰려니 오만 생각이 다 겹친다.
급한 김에 할 말을 다 못했나 싶어, 가는 인편 떠날 즈음 또다시 열어 본다.
(洛陽城裏見秋風, 欲作家書意萬重. 復恐悤悤說不盡, 行人臨發又開封.)
바람의 이미지가 계절마다 다를 수 있다면 봄바람은 가슴으로 느끼고 여름 바람은 온몸으로 즐기는 것일 테다. 한겨울 북풍한설이 귓전을 때린다면 가을바람은 아마 나뒹구는 낙엽에 담겨 눈앞에 일렁이는 게 아닐까. 시인이 불현듯 고향과 가족을 떠올린 것도 바람 부는 낙양성의 스산한 풍광을 본 데서 비롯된다. 오래 쌓아둔 마음의 소리가 거침없이 술술 쏟아질 법하건만 막상 붓을 드니 겹겹이 떠오르는 상념 때문에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행여 빠트린 말이 없을까 싶어 인편이 떠나기 직전까지도 안절부절못하고 허둥댄다. ‘가는 인편 떠날 즈음 또다시 열어 본’ 건 지극한 노스탤지어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 세상에 할 말 다 하고 부치는 편지가 어디 있던가. 영원히 미완의 소리요, 미완의 마음으로 봉할 수밖에 없는 것을.
시의 3·4구는 ‘춘향전’에도 인용되어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명구. 춘향의 편지를 들고 한양으로 향하는 방자를 길에서 만난 이도령이 편지 내용을 보려고 방자를 설득하는 장면에서다. 이도령이 ‘옛글에 이르기를 부공총총설부진(復恐悤悤說不盡)하여 행인임발우개봉(行人臨發又開封)이라 하였으니 잠깐 보고 돌려주겠노라’고 하자, 변장한 이도령을 몰라본 방자가 ‘이 자가 몰골은 흉악해도 문자 속은 기특하다’며 편지를 건넸던 것이다. 이도령이 인용할 정도로 이 시는 조선에서도 지명도가 높았고, 또 방자가 그 뜻을 금방 알아들을 만큼 평이한 구어체로 되어 있다는 점도 색다르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