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채권 부도’ 등 시장 흔들
국내 대형 증권사에서 회사채 발행 업무를 하는 A 씨는 최근 한 대기업의 재무팀 담당자를 만난 후 성과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 기업의 회사채 만기가 왔기에 새로 회사채를 발행해 만기 회사채를 갚는 ‘차환’ 발행을 상의하러 갔지만 기업 측에서 이전보다 눈에 띄게 오른 금리 때문에 포기했기 때문이다. A 씨는 “이전에는 1∼2%의 금리 정도면 회사채 발행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이보다 두세 배 높은 금리를 제시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며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들도 요즘 자금 조달이 막혀 답답해한다”고 전했다.
강원도 레고랜드 채권 부도 사태와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 시장 불안감 등의 여파로 기업들이 유례없는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 회사채 시장에는 찬바람이 분 지 오래고, 기준금리 인상과 증시 침체로 은행 대출이나 기업공개(IPO)를 통한 자금 조달도 어려워진 상태다. 유동성이 바닥난 지방의 중소 건설사들은 부도설에 휩싸이고 있다.
○ 얼어붙은 채권시장… 기업 자금난 증폭
회사채 발행 업무를 주관하는 증권사들은 최근 기업들의 자금난이 매우 심각하다고 입을 모은다. B증권사 관계자는 “회사채 발행을 검토하다가 중간에 포기한 기업들이 올해 셀 수도 없이 많다”며 “투자자 부족에 실망한 기업들이 시중은행의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고금리로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급한 기업들은 채권 시장에서 은행 대출로 발길을 돌리지만 역시 사정이 여의치 않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금리가 치솟는 데다 은행들이 위험 관리 차원에서 대출을 조이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대출 수요가 몰리면서 은행들도 필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비상이 걸렸다. 올 3분기 은행채 순발행액은 15조5080억 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의 5배에 달했다.
○ 건설사들은 ‘연쇄 부도’ 우려도
기업들의 자금줄이 막히면서 시장에서는 일부 중소 건설사 및 증권사의 부도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충남 지역 건설업체인 우석건설은 지난달 말 납부 기한이 도래한 어음을 결제하지 못한 탓에 1차 부도가 났다. 이달 말까지인 유예기간 내 상환도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최종 부도의 가능성이 큰 상태다.
최근 회사채 대란은 강원 춘천 레고랜드 조성 사업을 위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부도 사태가 계기가 됐다. 이 채권은 원래 강원도가 채무 보증을 했지만 나중에 그 약속을 어겨 결국 부도 처리되고 시장에 큰 충격을 남겼다. D증권사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담당자는 “지방정부가 갚겠다고 약속한 채권조차 부도 처리되는데 일반 건설사가 발행하는 채권에 누가 관심을 주겠냐”며 “요즘 여의도는 돈을 구하러 다니는 건설사 직원들로 가득하다”고 설명했다. 안성용 한국투자증권 부동산팀장은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당시 중소 건설사로부터 시작돼 1군 건설사로 번진 ‘연쇄 도산’이 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당국, 긴급 채권 매입… 허위 루머도 단속
기업들의 자금난이 심화되자 금융당국은 1조6000억 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를 즉각 가동하기로 했다.금융위원회는 이날 “단기자금시장 불안이 전반적인 금융시장 불안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시장 대응 노력을 강화하기로 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금융당국은 채안펀드 여유 재원으로 회사채, 기업어음(CP) 등을 직접 매입해 기업들의 돈 가뭄을 막을 방침이다.
금감원은 ‘합동 루머 단속반’을 가동해 증권사, 건설사 부도 등 근거 없는 루머를 유포하는 행위를 집중 감시하기로 했다. 금감원은 “악성 루머를 이용한 시장 교란 행위가 적발되면 신속히 수사기관에 넘길 것”이라고 했다.
이호 기자 number2@donga.com
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