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sight] 1962년 태동, 정부-中企 가교 역할… 설립 10년 만에 ‘경제 4단체’ 격상 단체수의계약제‧공제사업기금 시행…1987년 서울 여의도 중기회관 건립 중기대책반 구성해 외환위기 극복…경제 양극화 해소 ‘경제 3不’ 제시 팬데믹 속 중기 대출만기 연장 끌어내…지난해 ‘노란우산’ 재적가입 150만 돌파
60년을 이어온 중기중앙회의 역사는 땀과 열정을 바탕으로 숱한 역경을 헤쳐 온 한국경제의 역사와 상통한다.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1만2000개에 불과했던 국내 중소기업은 경제부흥에 따라 1980년 48만 개로 늘어났고, 현재는 약 728만 개로 증가했다. 총 근로자 수는 1754만 명에 이른다.
국내 중소기업은 전체 사업체 수의 99.9%, 고용의 81.3%를 차지한다. 한국경제의 근간이자 일자리 창출의 원천인 셈이다. 오랜 시간 공들여 이뤄진 중소기업계의 치열한 노력과 정부의 중소기업 육성 정책이 맺은 결실이다.
중기중앙회 태동…경제 4단체로 우뚝
1961년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이 제정되면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창립의 법적 발판이 마련됐다. 동시에 정부의 중소기업 보호·육성 정책이 적극 추진되면서 중기중앙회와 중소기업의 성장을 위한 사회적 디딤돌이 마련됐다. 중기중앙회는 1963년 제1회 기술지도강습회, 1964년 제1회 전국중소기업자대회를 개최하며 활동을 넓혀갔다. 1964년에는 처음으로 중소기업주간 설정 등 중소기업 자립을 위한 대외적인 위상 강화에도 적극 나섰다.
1965년은 ‘중소기업기본법’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인 사업들이 시작되기 시작한 때다. 중소기업 우선업종 지정과 단체수의계약 품목 지정도 당시 처음 시작됐다. 중소기업계의 권익을 대변하는 ‘중소기업뉴스’의 모태인 일간 중소기업통보도 창간됐다.
1970년대는 중기중앙회가 경제 4단체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한 시기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 3단체’라는 용어만 있었고, 이들이 국가 행사 등에서 경제단체 대표 역할을 했다.
중기중앙회의 외연이 넓어지면서 출범 10년을 맞은 1972년 들어 중기중앙회를 포함한 ‘경제 4단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중기중앙회 위상이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70년대는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1978년 2차 석유파동이 연이어 터지면서 한국경제의 큰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경제 4단체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중기중앙회는 석유 파동에 따른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납품가격 문제가 불거지자 1978년 처음으로 물가연동제 도입 필요성을 정부에 적극 건의했다.
중기중앙회의 설립 후 1970년대까지 정부는 계획적인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산업과 수출을 진흥시키고자 했다. 덕분에 당시 산업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중소기업의 집중적인 육성을 위해 관련법 제정 등 각종 정책이 집행될 수 있었고, 중기중앙회는 중소기업의 성장을 가속화하는 사업을 활발히 펼쳐나갈 수 있었다.
한국 경제 초고속 성장에 기여
1980년대 중기중앙회는 한국 경제가 초고속 성장을 이룬 ‘한강의 기적’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시기는 신자유주의 경제 흐름에 의해 수입·수출 개방과 탈규제 기조가 세계적으로 급속도로 확산되던 때다. 한국의 경제정책도 개방화, 규제 완화, 민영화가 다방면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중기중앙회는 빠르게 변화하는 경제 상황에서 중소기업 보호와 육성 정책을 정부에 건의해 차근차근 제도화를 이뤄 나갔다. 1981년 단체수의계약제도를 법제화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1984년에는 중소기업 공제기금사업이 시작되면서 직접적인 금융지원 역할을 하게 됐다. 1987년에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현재의 중소기업회관을 건립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한국 경제의 꾸준한 성장세 덕분에 1992년에는 중기중앙회의 조합회원사가 500개를 돌파했다. 1993년에는 중소기업연구원을 개원해 체계적인 중소기업정책 연구를 시작했다. 1994년에는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제도 시행, 1996년 중소기업 종합전시장 개장 등을 추진했다. 한국은 1995년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했고,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이어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혁신 中企와 세계로 진출
그러던 1997년 11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터졌다. 온 국민이 힘든 시기를 겪은 가운데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중소기업계였다.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전국 주요 공단의 30%가 공장 가동을 멈추는 위기를 맞았다. 중기중앙회는 신속히 ‘중소기업대책반’을 구성해 중소기업 피해 대책을 강구해 나갔다. 1998년 중소기업 창업지원센터를 개소하고, 1999년에는 제조물책임(PL) 공제사업도 추진했다. 2000년대는 중기중앙회가 대내외적으로 큰 변화를 겪은 시기다. 산업화 시대에서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로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2001년부터 중소기업 정보화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중소기업 IT(정보기술)체험관을 열었다.
중소기업 기술 혁신과 글로벌화 촉진 정책에 발맞춰 중기중앙회는 2003년 무역투자지원센터를 설치해 세계 시장 진출과 마케팅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기술 개발 촉진과 인력구조 고도화, 금융, 판로 개척, 지식서비스 등을 망라하는 각종 지원 정책도 펼쳤다. 또 중기중앙회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며 관련 법령의 제도화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2006년 3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법)이 제정됐고, 수차례에 걸쳐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이 개정됐다. 또 전통시장과 소상공인의 사업 영역을 보호하기 위한 기업형슈퍼마켓(SSM) 규제 강화 법안이 2010년 11월 개정됐다.
이 밖에도 중기중앙회는 이 시기에 △중기중앙회로 명칭 변경 △일반 중소기업단체 가입 등 회원 구조 개방 △노란우산공제 출범 △제1회 중소기업 리더스포럼 개최 △납품단가 현실화 궐기대회 등을 진행했다. 2011년 중기중앙회는 한국 경제의 양극화를 해소하고 상생 성장을 위해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를 위해 시장의 불균형, 거래의 불공정, 제도의 불합리를 지적하는 이른바 ‘경제 3불(不)’을 제시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양극화 해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2021년에는 10년간 달라진 경제 상황을 반영한 ‘신(新)경제 3불(不)’을 제안하며 정부의 제도 정비를 주장했다.
경제민주화로 중소기업 시대를 열다
중기중앙회는 2013년 중소기업 규제 문제를 정책 이슈화하는 ‘손톱 밑 가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이 용어를 인용해 대책을 지시할 만큼 중소기업 정책 방향으로 주목받았다. 이 밖에 중기중앙회는 △홈앤쇼핑 오픈(2012년) △가업(家業)승계 제도 개선(2014년) △제1차 중소기업협동조합활성화 3개년 계획 발표(2016년) △개성공단 재가동 국제여론 조성(美하원 방문·2019년 ) △협동조합 지원 지방조례 최초 제정(2019년) 등 중소기업 성장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팬데믹 위기가 시작되자 중기중앙회는 중소기업비상대책본부 운영에 나섰다. 발 빠르게 전국을 돌며 중소기업 현장의 애로 사항을 듣고, 이를 토대로 정부의 기업 대출만기 연장 결정을 총 5차례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2020년에는 △대·중기 납품단가조정위원회 출범 △한국노총과 공동 불공정센터 개소 △중소기업 규제 해소(최저임금·주52시간·중대재해법 등) 건의 △기초지자체 협동조합 지원조례 첫 제정 등 많은 활동을 이어갔다.
지난해는 중소기업기본법이 개정되면서 중기협동조합이 중소기업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또 노란우산공제 재적가입 150만 명 돌파, 중소기업 금융 지원을 혁신하기 위해 인터넷 은행인 토스뱅크의 주주 참여 등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올해는 제3차 중소기업협동조합활성화 3개년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 계획에 기반해 중소기업협동조합 최초로 R&D협업 지원사업이 첫발을 내딛고 40개의 조합이 선정됐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