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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안종주]산재예방, 패러다임이 바뀐다

입력 | 2022-10-25 03:00:00

안종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



안종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


산재예방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지난 정부는 5년 안에 산재 사망 사고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국민 앞에 선포했다. 그 계획에 따르면 2017년 사고 사망 만인율(근로자 1만 명당 사망자 수) 0.52를 2022년 0.26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사망자 수로 보면 964명이 482명으로 줄어야 한다. 가히 혁명적인 목표다. 이를 위해 정부와 공공기관의 산재예방 인력과 일터 감독 인력 등을 대폭 늘렸다. 또 고위험 사업장의 안전설비 지원 등을 위한 재정지원 비용을 획기적으로 증액했다. 작업장 감시·감독과 지도를 위한 패트롤 사업을 도입하는 등 목표 달성을 위해 총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실제 성과는 목표와 너무나 차이가 크다. 2021년 사고 사망 만인율은 0.43이고 사고사망자 수는 828명이었다. 사고 사망 만인율 0.09, 사망자 수 136명을 줄이는 데 그쳤다. 목표 대비 4분의 1수준이다.

사망을 포함해 산업재해 발생과 얽혀 있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고 복잡다단한 구조를 건드리지 않고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이 일터 안전 주체가 되어 열심히 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발상과 전략이 현장에서 통할 리가 없었다. 지난 20년간 산재사고 사망 추이를 분석하면 5년이란 짧은 기간에 산재사망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목표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20년간의 연도별 사망자 발생 추이를 살펴보면 등산객이 높은 산에서 하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사고 사망 만인율 1.24 안팎의 산봉우리 형태를 보이다가 본격 하산이 시작됐다. 그 뒤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절반이 훨씬 넘는 0.7까지 떨어져 2014년 0.58을 기록했다. 추세선의 모양을 보면 매우 가파르게 하산하는 형태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매우 완만한 하산 모양을 보인다. 2021년까지 7년간 0.15만 낮아졌으니 머릿속에 어렵지 않게 그 모양이 떠오를 것이다. 이는 냉철하게 보면 공급자 중심, 감독 위주, 정부 주도의 산재예방 전략은 이미 몇 년 전부터 한계에 봉착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새 정부는 일터 안전보건의 주체를 정부·공공기관이 아닌 기업과 근로자로 바꾸고 정부는 이를 뒷받침하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처벌과 감독 위주가 아니라 사전예방 중심의 산재예방 서비스를 수요자 맞춤형으로 공급하자는 전략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는 정부가 앞에 서서 따라오는 사업주와 근로자의 손을 잡고 이끄는 형태였다면 앞으로는 사업주와 근로자가 앞에 가고 정부는 뒤에서 이들을 미는 전략을 구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고용노동부에서 발표 예정인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의 핵심이기도 하다. 1981년 노동부가 발족하고 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된 뒤 40여 년 만에 산재예방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이는 선진국형 산재예방 패러다임이다. 수십 년간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는 정부 주도의 산재예방 전략을 바꾸는 것을 불편해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을 터이다. 이런 방식으로 산재사망을 과거보다 더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그 성공 여부는 오롯이 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일터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일찍 뿌리내리느냐에 달려 있다. 일터 안전을 위한 혁신에는 노·사·정 모두의 협력과 국민의 적극적 지지가 필수이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다.


안종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