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권력은 악한과 사기꾼과 약탈자들의 손에 들어가고 지도층은 무능하고 약해빠진 이들로 채워질 것이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1947년 독립을 선언했을 때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악담을 퍼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국주의 향수를 버리지 못한 채 쓴맛을 다시던 영국의 당시 분위기였다. 인도가 독립 75주년을 맞은 올해, 인도계인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이 영국의 새 총리로 결정되자 “처칠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민자 2세인 수낵 신임 총리는 영국 역사상 첫 비(非)백인 총리가 된다. 부모가 각각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살다 영국으로 이주한 인도계다. 이민자의 아들, 그것도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이민자의 핏줄이 견고했던 보수당 내 ‘백인 장벽’을 깨뜨린 것이다. 인도는 전역이 흥분에 휩싸였다. “제국주의의 반전”, “영국에서 뜨는 인도의 태양”, “제국을 떨치고 일어난 인도의 자손” 같은 표현이 인터넷에 쏟아지고 있다.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정의의 실현”이라는 평가도 있다.
▷불과 50일 전 수낵이 리즈 트러스와의 경선에서 패배했을 때만 해도 그의 정치 인생은 내리막길에 들어선 것처럼 보였다. 보수당원 16만 명이 진행한 투표에서 57% 대 43%로 고배를 마셨다. 부인의 탈세 논란 등으로 상처가 나면서 빠르게 존재감을 상실했다. 영국 생활을 접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역전의 기회는 드라마틱하게 찾아왔다. “총리를 다시 뽑게 됐다”고 알리는 전화를 받은 것은 그가 볼링장에서 공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수낵 총리가 자신을 지지하는 동료 의원 100명을 다시 끌어모으는 데는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트러스노믹스’ 파장을 경고해 판단력을 입증한 그는 보수당의 강력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경제위기를 뚫어낼 구체적 해법은 아직 없다. 재정 보수주의자인 그가 의료, 복지 지원 확대를 원하는 민심을 어떻게 끌고 갈지도 관전 포인트다. 영국의 추락을 멈춰 세울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면 ‘44일 천하’로 끝난 전임자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란 법은 없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